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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2019년 07월 02일(화) 09:51 [성주신문]
 

↑↑ 배 태 영
경희대 명예교수
ⓒ 성주신문


1951년 2월 18일. 21연대 본부는 제천까지 후퇴해서 넓은 들판에 진을 쳤다. 적은 파죽지세로 추격해 왔다. 우리 8사단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많은 병력이 손실되어 5사단과 교대를 하게 되었는데 교대할 때까지 제천 전선을 사수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렸다. 그래서 연대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모든 신병들이 차출되어 전선으로 투입됐다. 그래서 나에게도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1951년 2월 19일.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아침밥이 올라왔는데 주먹밥은 돌덩이처럼 얼었고 장조림 쇠고기 뭉치도 얼어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지펴 녹여서 먹고 있는데 소대장이 와서 저 앞에 보이는 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이 내렸다고 전했다. "일선에 배치되면 후퇴할 길부터 잘 봐 두라"는 것이 사병들 사이에 퍼져 있는 말인데도.

1951년 2월 20일. 드디어 적과 마주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적은 눈에 덮인 산봉우리를 빙글빙글 돌며 병력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군측에서는 사정거리 밖에 있는 적진을 향해 계속 총을 쏴댔다. 적군은 수를 과시하려 하고, 아군은 화력으로 제압하겠다는 신경전이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어둠이 깔리자 전진 명령이 내려 적진을 향해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미에는 헌병들이 깔려서 뒤따랐다. 그 순간, 날카로운 적의 총성이 울렸다. "따콩!" 그 총소리를 신호로 천둥 같은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다. 격렬한 총탄의 빗발 속에 야광탄의 불빛이 잔인하게 번득였다. 낮에 산봉우리에서 돌고 있던 적병이 어느새 그 산에서 내려왔던지 아군을 향해 바싹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쪽에서도 허겁지겁 있는 화력을 다 적진을 향해 쏟아 부었다. 적탄이 정말 우박 쏟아지듯이 날아왔다. 우리의 위치는 아주 불리한 상태였다. 눈 위에 훤히 노출되어 내려다보고 쏘아야 하는데 비해, 적은 밑에서 우리를 똑바로 겨냥해서 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쪽에는 엄폐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적을 향해 정신없이 총을 쏘다가 한순간 그만 미끌어졌는데 내가 위치했던 그 자리에 적의 야광탄이 비수 같이 꽂혔다. 섬뜩한 오한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하나님!" "하나님!" 하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총알이 사람을 피해야 살지, 사람이 총알을 피해 가지고는 결코 살 수 없는 현장이었다.

팔에 힘이 빠져, 총신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쏘다 보면 아군의 등을 쏘는 수도 있었다. 소대장은 앞에서 지휘하다가 소대원의 총알에 엉덩이를 맞고 뒤로 빠져 나갔다.

돌연 적의 사격이 일제히 중지되었다. 순간의 정적이 지나고 나자, 적이 후퇴하는 줄 알았던지 후방 지휘소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전진!" "전진!"

적의 저항 없이 얼마간을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뒤에서 적의 따발총이 벼락치듯이 일제히 불을 뿜어 댔다. 적이 매복해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습을 당한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후퇴명령도 없이 일제히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방에 깔려 있던 헌병들이 먼저 달아난 데다 어두운 밤이고 보니 누가 지휘관인지 졸병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큰소리 치는 자가 지휘관 행세를 했다.

제2선에는 5사단이 이미 도착하여 후퇴하는 아군을 집합소로 안내해 주었다. 5사단의 한 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변두리에서 야영을 했다. 포탄 상자를 산더미처럼 쌓아 불을 지펴 놓고 그 주위에서 모두 뻗어버렸다. 사흘 동안 제대로 눈을 붙여보지 못하고 험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쌓인 피로로 숨쉬는 송장이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한밤중에 난데없이 폭음이 터졌다. "쾅! 쾅!" 그 폭발 소리에 잠을 깼을 땐 이미 뜨거운 불덩이가 내 얼굴을 덮고 있었다. "기습이다!" 그 소리에 "하나님!"하며 방향도 모르고 덮어놓고 들고 뛰었다. 눈알이 빠져 나가고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앞도 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무엇엔가 부딪쳐 쓰러졌다. 천막이었다. 천막 안에서 잠자던 군인들이 쏟아져 나와 법석댔다. "불붙은 방한복부터 벗겨라." "팔에 부상이다." "압박붕대!" "내 눈 있습니까?" "그래, 눈은 괜찮다." "코는요?" "코도 괜찮다." 그 소리를 듣고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1951년 2월 21일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고, 나는 앰블런스에 실려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건명 일병이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좀 어떠냐? 의무대 위생병이 그러는데 너 참 운 좋은 놈이라고 하더라." "이게 운 좋은 거냐?" "임마, 좀 들어봐. 네가 부딪쳐 넘어진 그 천막이 바로 의무대 천막이었어. 방한복에는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지, 팔에는 피가 콸콸 흐르고 있지, 조금만 빗나가서 그 천막에 부딪치지 않았더라면 칠흑 같은 한밤중에 어디선가 출혈로 죽었거나, 솜 옷 불에 굽혀서 죽었을 거라는 거야. 너 맨날 '하나님! 하나님!' 하더니 하나님이 도우신거야." "근데 넌 어딜 다쳤어?" "난 발을 좀 다쳤을 뿐이야. 어젯밤에 적이 스며들어 숯불 더미에 수류탄을 까 넣고 달아났데."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지금 내가 이렇게 숨쉬고 있다.
성주신문 기자  sjnews56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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