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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공원의 엘리지
2018년 10월 23일(화) 11:01 [성주신문]
 

↑↑ 배 철
국제문인협회 회원·수필가
ⓒ 성주신문

지난해 봄 어느 날 서울에서 어느 영화제작사로부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만한 원작을 한 편 만들어서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영화 이야기를 수없이 팔아먹은 나. 더구나 이제 늙은 머리통 속에서는 실화를 근거로 한 영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젊었을 때는 수성들 봄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였다. 지금의 대구은행 본점이 있는 곳에서부터 수성못까지는 단독주택이 몇 집 있기는 했으나 거의가 논밭이었고 작은 개천도 있었다. 수성들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광대하고도 아담한 들판이었다.

나는 가끔 소망이 있다면 수성들판과 수성못을 나의 소유로 해보았으면 하는 어이없는 망상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수성들엔 봄이면 채소를 주로 재배했으나 벼나 보리도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나는 넓은 수성 평야의 원색으로 펼쳐진 그림들 중에서 보리의 파도, 맥파(麥波)가 일렁일 때를 미치도록 좋아했었다. 녹색과 노란색이 적당히 배합된 늦은 봄의 보리의 물결은 나를 무상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수성 못 둑에 앉아서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가벼운 황록색의 춘맥(春麥)파도를 보노라면 어느 명화인들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브라보, 원더풀을 연발했다.

수성들의 보리파도 그림이 춤추는 계절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이홉짜리 소주 두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갖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수성못까지 갔다. 초록색과 노란색의 물결이 춤을 출 때는 나의 영혼은 보리의 파도에 실려서 두둥실 두리둥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나의 혼백이 춤을 추는 동안 갖고 간 소주 두 병은 빈 병이 되었고 나는 어느덧 이태백이도 되고 도연명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 십년이 지난 요즘은 수성들 보리의 물결은 흔적도 없다. 영화사에서 전화가 오던 이튿날 나는 그래도 행여나하고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수성 못둑엘 갔었다. 그러나 그건 아! 옛날이었다. 나는 옛적의 보리파도는 바라지도 않았고 다만 한 떼기 보리밭이라도 있으려니 했으나 실망뿐이었다. 모두가 잿빛 아파트 숲이었고 아니면 무슨 식당 무슨 부동산소개소 무슨 마트 따위뿐이었고 직선으로 뻗은 아스팔트 길은 나의 오장육부까지도 딱딱하게 굳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에 왔다가 지하철을 타고 경산 쪽으로 갔다. 그러나 그 기름지고 넓기만 하던 연호, 고산, 경산들판은 간 곳이 없고 대구시내를 뺨칠 것만 같이 빌딩숲과 아스팔트 도로뿐이었다. 회색빌딩과 각지고 쪽 곧은 도로가 그렇게도 소원이었던가? 나는 보리파도의 환상을 대구나 대구근교에서 얻기를 포기하고 대구스타디움 뒷산인 대덕산(대구 앞산이 아님) 정상에 올라가서 잠시 쉬었다 오기로 했다. 나는 소나무 갈비와 참나무 낙엽들을 거의 한가마니쯤 긁어 모아서 큰 소나무 밑에 깔고 그 위에 반듯이 누워서 소나무 가지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조각만 한 시간 쯤 쳐다보고 오리라 작심했다.

그러나 그 때 멀리 동녘 들판에서 들려오는 디젤 기관차의 기적소리 때문에 나의 한시간짜리 작심은 무산되고 말았다. 내가 수 십년 전에 대덕산 정상에 바라본 경산동쪽 들판엔 디젤기관차가 아니고 증기기관차가 마치 큰 벌레처럼 느릿하게 기어가면서 하얀 증기를 뿜어내며 구슬프게 구슬프게 울었거늘….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었고 시였고 군대간 아들의 전사통보를 받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핏빛 통곡소리 같기만 했었다. 한문으로 표현한다면 망자가(望子歌)라고나 할까. 디젤기관차가 사라지더니 그 뒤엔 KTX가 마치 먹이를 쫓아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거대한 구렁이처럼 동대구역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옛날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몹시 듣고 싶었고 어머니가 한없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대덕산 꼭대기에서 한 시간을 채우지 않고 하산했다. 대구스타디움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에 비내리는 고모령의 현인 선생의 훤한 이마가 오버랩되면서 내가 탄 택시는 망우공원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어머니의 모습과 현인 선생의 이마는 어디로 가버리고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을씨년스럽게 내 앞에 우뚝 서있지 않는가. 비석은 나를 보더니 울면서 서있었다. 고모령 노래 불렀던 임은 떠나고 노래도 빛바랜 추억속의 유행가가 되고 보니 찾는 이도 드물다면서….

나는 비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사왔었다. 나는 종이컵에 소주 한 잔을 넘치도록 따라놓고 노래가사 앞에서 정중하게 큰 절을 두 번했다. 그리고 현인 선생이 마셨던 종이컵의 술도 병에 남은 소주도 단숨에 마셨다. 대덕산과 망우공원까지는 반시간도 안걸리는데 소주 두 병을 다 먹었으니 나의 위장 속에서는 온갖 회포가 소용돌이치면서 내 입에서는 비내리는 고모령이 흘러나왔다. 이 때 홍안의 중학생 한 녀석이 새우깡 한 개를 나의 허락도 없이 낼름 입에 넣더니 "할아버지 저도 비내라는 고모령을 부를까요?"하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너만한 중학생이었던 때가 어제만 같은데 벌써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세월이 빠른 건 당연하겠구나" 하고는 나는 그 중학생과 고모령 노래를 이절까지 합창했다.

현인 선생도 우리와 같이 고모령을 불렀을까? 아마도 우리와 같이 울면서 불렀으리라. 그 날따라 망우공원엔 궂은 비까지 내려서 비석엔 눈물 같은 빗물이 노래가사 위를 타고 흘렀다.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와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내 마음을 망우공원 하늘도 알았던가 보다.
성주신문 기자  sjnews56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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