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극작가요 비평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상금을 거절한 사람으로 거의 백년의 세월을 살면서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글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아무리 평생을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살았고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라 해도 이 글을 단지 하나의 유머로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오를 엿보게 된다.
버나드 쇼는 평소에 심장이 좀 약했다. 그래서 조금만 과로하거나 신경을 쓰면 심장이 갑자기 벌컥 멎는 그런 심장병 환자였다. 어느 날 그의 주치의가 그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심장이 멎어가고 있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빨리 와 달라고 했다. 의사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급히 차를 몰고 가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세 계단씩 건너뛰어서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 의사가 심장마비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인 버나드 쇼가 얼마나 다급했던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지고 쫓아가서 입을 벌려 더운물을 밀어 넣고, 찬물로 머리에 습포를 하고, 옷을 벗기고는 가슴에 마사지를 하고, 그리고 자기가 급할 때 먹던 비상약을 먹였다. 그 의사가 급할 때 하라고 가르쳐 준 그대로 했다. 그래도 의사가 숨만 헐떡거리고 깨어나지를 않았다. 한 40분 동안 땀을 흘리며 계속 응급처치를 했더니 그제야 눈을 썩 떴다. “고맙습니다. 이제 내가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내가 죽을 뻔했습니다. 나를 좀 안정시켜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래서 한 20분 동안 누워 있게 했더니, 슬며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하는 말이 “선생님, 왕진료하고 치료비를 주셔야지요”라고 하며 돈을 달라고 했다.
버나드 쇼가 하도 기가 막혀서 “여보, 내가 할 말 사돈이 하네요. 당신이 죽게 된 것을 내가 살려 놓았는데 나한테 치료비를 달라고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고 했더니 그 의사가 말했다. “당신이 급해서 나한테 전화를 했지요?” “그랬지요” “당신 그때 침대에 누워 있었지요” “맞아요” “내가 와서 쓰러지니까 당신이 벌떡 일어났지요” “그랬어요” “내가 누워 있으니까 당신이 나를 주무르고 마사지하고 했지요?” “예, 맞아요” “나에게 약을 먹였지요” “맞아요. 약을 먹였어요” “그게 바로 나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신의 병은 심장에 있는 것보다 당신의 생각에 있어요. 걸핏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해. 툭하면 의사 불러 치료해 달라고 해. 그게 당신의 병입니다. 그런데 그 병을 오늘 내가 고쳤어요. 그러니 치료비를 주셔야지요”
생각이 중요하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죽겠네”, “못해 먹겠다”는 부정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사물의 밝은 면을 보아야 한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Yes, I can.)으로 나아가면 어떠한 난제라도 풀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생긴다. ‘금융위기’의 시대, 여기에도 어두운 면과 밝은 면, 양면이 있다. 밝은 면을 바라보자. 여기에 기회가 있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나아가자.
유대인은 자녀를 교육할 때 비전(vision)을 가르치며 소년 다윗과 거장 골리앗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은 우리가 치기에는 너무 크다(too big to hit).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칠 수가 없다”라고 생각했으나, 소년 다윗은 “나의 물맷돌이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이 너무 크다(too big to miss). 그러므로 나의 물맷돌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보는 눈이 다르다. 거인 골리앗은 무섭게만 보면 행동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의 몸집이 큰 것을 보고 자기가 날린 물맷돌이 적중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도 금융위기란 골리앗 앞에 겁낼 것 없다. 여기에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라.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기회 놓쳐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