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안동 김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김안길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고 벼슬을 하지 못해 나이 30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던 중 친구의 중매로 어느 대가의 혼기를 놓친 노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첫날밤에 신부가 진통을 일으키더니 옥동자를 낳았다. 내당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당이라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혼자서 겪게 되었다. 너무나 괘씸한 생각이 들어 당장 장인장모에게 항의를 해서 피해 보상이라도 요구할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부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을 불쌍히 여겨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밖에다 내버리기로 했다.
아이를 강보에 싸서 안고 담을 넘어 장동교(藏洞橋) 다리 밑에다 눕혀놓고 돌아섰다. 추운 겨울밤이었는데 돌아서서 몇 발자국을 떼었을 때 아이가 살려 달라는 듯이 울기 시작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다시 아이를 안고 장안에 혼자 살고 있는 고모네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첫날밤에 하도 달이 밝아 밖에 나와 봤는데 담 넘어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가 보았더니 갓난아이가 버려져 있어,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해서 안고 왔으니 좀 길러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와 보니 신부는 죽은 듯이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날이 샐 무렵에 이번에는 신랑이 ‘진통’을 일으켰다. 내당을 향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니까 장모가 듣고 달려왔다. 의원을 불러오려 했으나 자기 병은 자기가 잘 안다고 하면서 미역국을 끓여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신부의 산후 구완을 해 주었다.
세월이 흘러 25년이 지났다. 과거에는 운이 없는 듯, 50세가 넘어 처가에서 타고 나온 재산도 다 탕진하고 남산 밑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사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밤 현종 임금께서 미복 잠행(微服潛行)을 하던 중 김안길의 집 근처까지 왔다가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 집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현종은 김안길의 생명 경외의 착한 마음에 감동해서 가지고 있던 돈을 주면서 다음 과거가 고시되거든 꼭 응과하라고 권했다.
얼마 후에 과거령이 내려 응과를 했는데 그 날 과제(科題)가 ‘장가든 첫날밤에 아들을 얻다 (娶妻初夜得男兒)’였다. 바로 김안길 자신의 과거 이야기였다. 그 날 밤 현종에게 이야기한 대로 글을 지어내어 급제했다. 50이 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후손이 복을 받아 영조·정조·순조 3대에 걸쳐 사상 유례가 없는 세도를 누리게 되었다.
약혼녀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을 폭로하면 약혼녀도 뱃속의 아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가만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던 요셉의 그 생명 경외의 어진 마음이 구세주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하게 했다.
인간의 생명만큼 귀한 것은 없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경외의 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하여 그 희소가치가 상실되고, 황금만능의 풍조는 돈을 인간 위에 올려놓았으며, 과학기술의 확대재생산이 인간부재의 상태를 초래하여 그렇게도 존엄하고 귀한 인간은 한낱 물질로 전락하고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경시되고 있다.
요즘 세상을 경악하게 한 강호순의 연쇄살인 사건, 용산 철거민 농성 진압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지하철 방화 사건 등이 모두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편만한 가운데서 저질러진 결과이다.
이들 사건을 단지 어떤 개인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로만 돌리거나, 강경 진압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내서 될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사회 전반이 책임을 져야 한다. 산업기술 교육에 편중된 나머지 윤리도덕 교육을 소홀히 한 국가, 황금숭배에 눈이 멀어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있는 사회, 염불보다도 잿밥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계, 모두가 대오각성하고 인간 생명의 경외와 인권존중을 위해 제반 정책의 틀을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내 임기 중에, 내 당대에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겠다고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거시적이고 원대한 안목으로 내다 보라. 하루를 행복하려거든 이발을 하고, 한 해를 행복하려거든 새 집을 사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라. 그리고 내가 죽고 난 후에 내 후손이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거든 인간의 생명을 경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