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농산(廉山)(1860-1947 추정)은 기생이었다. 앵무새라는 이름의 앵무(鸚鵡)는 예명(藝名)이다. 성(姓) 씨가 염 씨였다면 농산 역시 예명일 수도 있다. 농산은 중국에 있는 지명이며 앵무새가 많은 지방이라 한다. 기생 앵무와 성주군 용암과의 인연은 밝혀진 바가 없다. 아마도 앵무의 선대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봐서 관기(官妓)는 하층 계급으로 내놓을 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생 염 씨 앵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하에 있을 때 국채를 발행하였는데 그 액수가 연간 국가예산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어서 나라의 존망이 위협받게 되자 그 국채를 이천만 국민이 담배를 피우지 말고 모아서 채무를 갚자는 운동이며 이 국채보상운동의 기록물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에 참여하는 신(新) 여성의 반열에 섰다. 그때 대구의 서상돈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앵무는 기생의 몸으로 거금 100원을 기부하여 전국적으로 부녀자와 하층민들이 국채보상운도에 참여하게 하는데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 여성 거물이다.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현 용암면사무소 근처에는 비각(碑閣)도 없이 홀로 서있는 빗돌이 하나 있다. 염농산제언공덕비(廉山堤堰功德碑)이다. 제언은 들 제字에 언은 방죽, 방축을 말하는 글자이다. 즉 염농산이 방죽을 쌓은 공을 기리는 비라고 할 수 있다. 기생 앵무가 왜 어떤 연유로 성주 용암들에 방죽을 쌓는데 큰돈을 들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기생 염 씨 앵무는 1907년 3.12일 에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간섭할 것은 아니나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째서 남자들의 참여 방법만 제시하고 여자의 참여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는지 여자는 국민이 아니며 임금의 자녀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격문의 기사를 보면 신여성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마다 냇물(新川)이 범람하여 백성이 굶주림에 처한 사정을 안 앵무가 좌고우면 하지 않고 그 일을 진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뿐이다. 앵무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는데 유독 성주 용암의 앵무 들판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의 자료조차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거금을 쾌척하였고 성주에서 큰 둑을 쌓은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38년에는 교남학교(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 이며 1921년 홍주일, 김영서, 정은기 등 애국지사 3명이 교남학원(嶠南學院)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학교를 세웠고 교남학교를 거처 금년 개교 100년을 맞았다)가 각종의 부채로 인해 일본인 지주에게 학교가 넘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인 이만 원을 기부하여 학교를 건졌다는 기록이 1937년 4.24일자의 기사에 나와 있다. 이때 염 씨의 나이가 일흔아홉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생물연대를 추정하면 1860년 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으로 여겨진다. 기생 염 씨 앵무에 대해 남겨진 다른 자료도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한 큰 여성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의 앵무 들판은 기름진 농지로 번성 하리라. 오래도록 기억되고 그 흔적은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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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숨은 이야기④ 앵무의 공덕은 잊히고 찾는 사람 없어


김소정 기자 / 입력 : 2021/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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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종 출 펫헤븐AE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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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농산(廉山)(1860-1947 추정)은 기생이었다. 앵무새라는 이름의 앵무(鸚鵡)는 예명(藝名)이다. 성(姓) 씨가 염 씨였다면 농산 역시 예명일 수도 있다. 농산은 중국에 있는 지명이며 앵무새가 많은 지방이라 한다.

기생 앵무와 성주군 용암과의 인연은 밝혀진 바가 없다. 아마도 앵무의 선대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봐서 관기(官妓)는 하층 계급으로 내놓을 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생 염 씨 앵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하에 있을 때 국채를 발행하였는데 그 액수가 연간 국가예산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어서 나라의 존망이 위협받게 되자 그 국채를 이천만 국민이 담배를 피우지 말고 모아서 채무를 갚자는 운동이며 이 국채보상운동의 기록물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에 참여하는 신(新) 여성의 반열에 섰다. 그때 대구의 서상돈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앵무는 기생의 몸으로 거금 100원을 기부하여 전국적으로 부녀자와 하층민들이 국채보상운도에 참여하게 하는데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 여성 거물이다.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현 용암면사무소 근처에는 비각(碑閣)도 없이 홀로 서있는 빗돌이 하나 있다. 염농산제언공덕비(廉山堤堰功德碑)이다. 제언은 들 제字에 언은 방죽, 방축을 말하는 글자이다. 즉 염농산이 방죽을 쌓은 공을 기리는 비라고 할 수 있다. 기생 앵무가 왜 어떤 연유로 성주 용암들에 방죽을 쌓는데 큰돈을 들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기생 염 씨 앵무는 1907년 3.12일 <대한매일신보>에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간섭할 것은 아니나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째서 남자들의 참여 방법만 제시하고 여자의 참여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는지 여자는 국민이 아니며 임금의 자녀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격문의 기사를 보면 신여성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마다 냇물(新川)이 범람하여 백성이 굶주림에 처한 사정을 안 앵무가 좌고우면 하지 않고 그 일을 진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뿐이다.

앵무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는데 유독 성주 용암의 앵무 들판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의 자료조차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거금을 쾌척하였고 성주에서 큰 둑을 쌓은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38년에는 교남학교(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 이며 1921년 홍주일, 김영서, 정은기 등 애국지사 3명이 교남학원(嶠南學院)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학교를 세웠고 교남학교를 거처 금년 개교 100년을 맞았다)가 각종의 부채로 인해 일본인 지주에게 학교가 넘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인 이만 원을 기부하여 학교를 건졌다는 기록이 1937년 4.24일자<동아일보>의 기사에 나와 있다. 이때 염 씨의 나이가 일흔아홉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생물연대를 추정하면 1860년 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으로 여겨진다.

기생 염 씨 앵무에 대해 남겨진 다른 자료도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한 큰 여성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의 앵무 들판은 기름진 농지로 번성 하리라.

오래도록 기억되고 그 흔적은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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