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 선조25년 1592년에 시작되었다. 조선이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을 때 명나라의 병부상서(국방부장관정도의 관직)는 석성이었다. 석성과 그의 부인과 조선 사이에 얽힌 사연은 차치하고 석성은 이여송을 대장으로 하여 사만여명의 군사를 파견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석성은 정유재란 이후에 정적의 모함으로 옥사 하게 되고 그의 부인과 아들을 황해도 해주에 정착 영주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함께 조선으로 파견된 두사충이라는 장수는 명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 하였고 지금의 대구시 대명동에서 정착해 영주하였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후손들이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지은 모명재(慕明齋)가 지금의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고 묘도 근처에 있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략한 전쟁이다. 이때도 조선은 명나라에 파병을 청하였고 명나라의 장수 시문용(施文用) 과 서학(徐鶴)이 장수로 파병되었다. 중국 절강 출신의 서학과 시문용이 조선에 귀화하고 은둔했던 곳이 현 성주군 용암면에 있는 대명마을이다. 시문용은 광해군 때 중추부첨지의 벼슬을 지냈고 다수의 저서도 있다. 서학은 도총관을 지냈으며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석성의 후손 중에 서학의 사위가 된 자가 있었는데 성주석씨의 시조가 된다. 인조14년에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 태종이 명나라의 장수들을 잡아들이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장수 시문용과 서학은 조선에 귀화하게 되고 두사충과는 다르게 번화한 곳이 아닌 지금의 경북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 깊은 곳에서 은거하게 된다. 조선에서 절강施氏와 徐氏시조가 된다. 후대에 이들을 기리는 재실도 세워졌다. 풍천재다. 풍천재는 시문용과 서학을 기리는 재실이고 조선 순조34년(1834)건립한 기록이 있다. 풍천재 기둥에 음각된 시의 구절만 봐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애절하다. 저문 날 슬피 노래하며 중원을 바라보니 소북성진이 눈앞에 가득하네. 바람과 연기 속에 고향을 그리며 삼한에서 자손 길렀네. 중국의 산하에서 자란 두 장수는 조선 땅에 대명촌을 이루었다. 조선에 귀화하게 된 이들은 단(壇)을 쌓고 두고 온 고국의 산하를 그리며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 고향을 향해 절을 하였다는 자리가 대명단(大明壇)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을 경계하는 것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을 생이별 시키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6.25 전쟁으로 이산이 된 가족이 그렇다. 사백여년 전에 남의 나라 전쟁에 지원군으로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거나 안했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고향이라는 의미를 새겨보게 하는 대명단은 낙엽만 가득 쌓인 채로 찾는 사람 없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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