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대기를 `큰 바다에 좁쌀 한 알(滄海一粟)`로 쓴 일이 있다. 쓰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나의 박학(薄學)이 드러나 좀 많이 면구스럽다. 게다가 우리들이 통념으로 쓰는 `석학`을 선생께 쓰고 보니 솔직히 말해 내 `분수`와 `(어디)감히···`가 떠오른다. 자책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내 짧은 식견으로 그나마도 주마간산으로 쓴 미진함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선생의 명성이 중후함인지 한 종합 채널이 `고맙습니다`의 제명으로 특집방송을 했다. 문화부 장관 재임 때였다. 2000년 1월 1일 희망의 새 천년을 맞으며 "새 천년 `새 생명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30곳 산부인과에 직원을 보내 "0시에 출산하는 아기의 `위대한 기록`을 남겨 희망찬 새 시대를 여는 여명을 밝히라" 했다. 상당한 반대도 있었지만 나중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선생의 걸출한 착상`이라며 모두들 놀랐다 한다. `굴렁쇠 소년` 연출도 여성은 물론 성인 등장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다는데, 아무도 흉내도 낼 수 없는 그 혜안에 다시 놀랐다. 굴렁쇠가 등장하기 전 잠시 고요함이 흘러 모두 의아해 할 때 적막을 깬 굴렁쇠가 텅 빈 광활한 축제의 장에 나타났다. 동시에 1분 여 "삐이이~~" 하는, 단순음조의 `신의 한수`를 연출했다. 그 단순음조는 관중의 정적을 깨지는 못했다. 이는 아마도 인류의 원초적인 동심 표출에 예(禮)를 차린 건 아닐까 하는, 참 조심스런 내 생각이다. 그러던 중 소년이 굴렁쇠를 들고 손을 흔드니 그때서야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져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 88올림픽 때는 육대주의 온 지구인들을 감동케 한 `벽을 넘어서`가 있었다(작사자는 나는 모른다). 처음엔 `장벽을 넘어서···`였었는데 이를 본 선생이 `장벽`은 사물을 가로막는 부정적 요소가 있으니 `장`을, 역시 반대를 무릅쓰고 삭제하라 하여 `벽을 넘어서`가 되기도 했다는 비화도 나왔다. 선생의 한 후학이 말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이 담겨 있어야 이런 박학다식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생 130여 권의 저작물을 냈으니 박학다식만으로는 부족할 칭송이었다. `국민 사범(師範)`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직역의 구분도 없이 어디에나 사회적 사범(지식인)이 있다. 그들에겐 "`쓰면 글`이 되고, `하면 말`이 된다"는 통설이 있다. 외람되지만 선생이 하는 해박한 담론마다 큰 울림이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쓰는 `젓가락`을 보고도 "너 누구니(젓가락의 문화유전자)"의 제호로 책을 냈으니. 사실 `젓가락` 얘기는 수년 전 선생의 한 칼럼에 나왔지만, 당시 내 식견으로 거기 무슨 심오한 뜻이 있을까 했다. 지금 그 책을 보니 이 둔재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사유의 세계를 섭렵하고 있었음에 또 놀라고 말았다. `수저고개`로 시작한 항목(chapter)이 열둘이었다. 주역의 사상(四象) 팔계(八戒)에 연결하는가 하면, 실제로 사용했던 금·은·동 수저가 있었고, 한때 세태를 풍자하여 사회적 이슈가 됐던 `금수저(아빠찬스)` `흙수저`도 있었다. 특히 `젓가락질 교육이 필요한 이유` 항목에선, 2014년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이 서울 통인시장에서 젓가락으로 떡볶이 먹는 사진도 있었으니, 선생의 사유가 얼마의 광폭인지를 알게도 했다. 게다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수저(사진)를 싣는가 하면, 일본 헤이조쿄유적에서 나온 젓가락을 실었으니 역시 시공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통찰이 있었음에 놀라울 뿐이다 "물을 보면 그 시원을 생각하라" 했고, "태어날 때 기저귀를 차고 나오고, 죽을 때는 죽음의 기저귀를 찬다"고 했다. 오늘의 정보화 시대에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독립적 존재가 아닌 공존으로 모색하고 상호 보완관계인 `디지로그(digilog)`의 개념도 주창했다. 그게 문명의 시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님 이민아 목사의 먼저 떠난 부음을 듣고는, `나보다 10년 먼저 간 건데 뭘···` 하는, 범인(凡人)이라면 애잔함에 목이 멜 텐데, 선생은 역시 `대인의 풍모`였다. 또 있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는,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약물치료를 거부한다`였다. 초인의 경지였다. 이럴 때 어느 장삼이사가 이런 평온한 심상(心象)을 갖기나 할까. 선생이 30대 초반 신예(新銳) 문학평론가일 때, 지금의 시각으로는 `원로`라 할 대선배인 서정주, 김동리에게 이른바 `주류의 권위` 등을 비판하는 논전으로 도전한 사실도 있었다. 당시는 이 두 분을 `우상`이라 할 만큼의 위치에 있었지만, 선생의 시각으로는 영국 철학자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에 비유하며 두 분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베이컨)의 근저에 있는 `우상(허상)의 파괴`였다. 소장 학자가 기존의 문학 질서를 혁파했다는, 선생의 의미심장한 광폭 행보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어제는 `전천후 예술인`의 49재를 맞아 예술인 중심으로 장예전(長藝典-예술계의 큰 어른)도 지냈다. 열흘이 채 못 되어 종명하실 분이 아직도 못다한 얘기가 있는지, 건강하실 때와 다르지 않게 담론을 펴는 것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참으로 저어되는 말, 피골상련하여 초췌함이 역력했지만 문맥 하나에도 막힘없는 열강이었으니 그게 가슴을 아리게 했다. 낼모래면 떠나실 분이라 믿을 수 없었다. 언제 또 고매함의 스토리텔링을 들을까, 탄식만 나왔다. 백수백복을 누리며 사회와 나라에 그 고매한 경륜도 더 펼쳤으면 했는데, 이 나라의 큰 손실이었다. 아아! 능소(凌宵) 이어령 선생이여, 부디 영면하소서···!!!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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