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언론에 비친 군상(郡像)
약25년 전 언론에 비친 郡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82년 격월간지 ‘영우구락부(嶺友俱樂部)’에는 성주군의 연혁과 유적 및 유물, 특산물, 풍습, 역사의 인물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비록 4반세기에 불과한 세월이건만 지금의 모습에 비하면 보다 옛 정취를 진하게 풍기는 듯하다. 독자들에게는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고 혹여 청소년들에게는 우리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알게 함으로써 자긍심 고취에 도움이 될까해서 이를 옮겨보고자 한다. 당시 취재를 담당했던 배종달 취재부장의 기사 원문을 가급적 그대로 인용하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가필(加筆)도 불사했다. 또 지면의 제한 등으로 일부는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본 자료는 배판곤 전 군의원이 제공한 것이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郡의 연혁과 지형 및 기상
□ 유적, 유물의 모습(Ⅰ)
□ 생활상과 특산품
□ 성주를 빛낸 역사의 인물
유적, 유물의 모습(Ⅰ)
◇채색도 아름다운 노석동 마애 3존 석불
선남면 노석동에 있는 마애 3존석불은 성주읍에서는 19㎞쯤 떨어진 노석 1동 도고산(道高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2개의 큰 바위가 ㄱ자를 이루며 서있다. 폭 5m 정도의 이 바위에 동향(東向)으로 새겨진 불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오른쪽에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왼쪽에 관음보살, 옆에 미륵반가사유상( 彌勒半跏思惟像) 등 4개의 불상이 1977년 발견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좌상(坐像)의 아미타불의 높이가 2m, 가장 작은 미륵불이 90㎝, 모두 얇은 양각으로 마치 선각(線刻) 같은 느낌을 주고 본존인 아미타불의 하반부는 바위가 떨어져 나가서 그 모양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지만 무릎폭은 약 1m, 머리 높이는 53㎝, 어깨 폭은 60㎝가 넘는다.
광배(光背)를 갖고 있는데 두광(頭光)은 2줄의 선으로 둥글게 표현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렸으나 왼손은 없어지고 법의는 우견편단(右肩片段)이며 복연대좌(伏蓮台坐)를 깔고 있다.
좌우의 협시(挾侍)보살은 본존과 같이 광배와 복연대좌를 갖추고 모두 본존을 향해 앉아 있으며 왼쪽 보살이 약간 크다.
특히 오른쪽 대세지보살은 두 다리를 비꼬아 앉은 교각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의 마애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아주 드문 것이다. 또 불상에는 붉은색, 주황색, 푸른색 등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그 채색이 언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전실(前室)이 있어 불상이나 채색이 오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바위 위에는 전실을 설치하면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길이 30㎝ 정도의 홈이 파져있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와 몸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직후(670년 경)의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앞 터에는 기와조각과 초석이 흩어져 있어 전실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고 탑재(塔材)들이 불상 앞 공간 낭떠러지 밑에 딩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그만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보물 제6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상의 얼이 담긴 성산 고분군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주읍 성산 밑의 성산동, 선남면 신부동, 용암면 장학동 ermd에 산재하여 있고 대구의 무태동, 동촌, 고령(대가야)의 고분과 같이 크고 작음이 차이가 없으며, 속칭 고래장(高來葬) 또는 고려장(高麗葬)이라고 부른다.
일본 치하에서 많이 발굴되었고 도굴에 의하여 유물은 거의 없으며 완전한 것은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출토품으로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동, 철제품, 자기, 도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일부는 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벽진가야 시대로부터 신라시대, 고려조에 해당하는 것이며, 석기와 철기 병용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성주군내에는 금수면 명천동, 대가면 옥화동·도남동, 월항면 인촌동·용각동 등에 크고 작은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한강의 교육도장 회연서원(檜淵書院)
수륜면 신정동 양정마을에 있다. 1583년 한강의 문도들이 세운 회연초당 자리에 1627년(인조 5년)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주향(主享)으로 세운 서원인데 1690년(숙종16년)에 사액(賜額)되었다.
이 서원에는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양현청(養賢廳) 등의 건물이 있어 그들 건물의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인데 양현청은 1868년(고종5년) 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 서원 곁에 1670년(현종11년)에 세운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宋師 ),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동호 이서를 향사 했으나 서원 철폐 때 향현사도 철폐됐다. 서원 앞 뜰 백매원(百梅園)에는 한강의 신도비가 있다.
1974년 건물을 보수하고, 1975년 일각문을 보수, 1976년에는 동·서재를 신축했다. 정면은 5칸, 측면은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한강의 문집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동방사지 7층 석탑
신라 40대 애장왕 때에 건립된 동방사 내의 석탑으로 탑의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경북 지방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읍 예산리(속칭 신풍리 압숙골)에 위치하고 성주에서 왜관도로 1㎞지점에 있어 성주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유서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당초는 9층 석탑이었으나 현재는 7층 석탑으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옥개석이 훼손되고 주위가 농토화 됨으로써 지반이 물러져 5도 정도 탑이 기울어져 있는데 기단부는 매몰되었으나 균형잡힌 탑신의 규모가 크고 남쪽으로 향하여 있다. 2층 탑신까지는 양쪽 우주와 중앙부 탱주가 있으며 상층 탑신부터는 우주만 있고 1∼3층 옥개석 4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전체를 축조한 것이 동방사의 유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불교 전성시기인 통일신라 후기에 행정도심지에다 대가람을 건립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불심을 고취하여 국태민안의 기원 전당으로 한 것이다.
이 탑은 이천에서 불과 500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20년(경신년) 대홍수에 흐름이 바뀌어 탑과 냇바닥과는 1㎞의 거리로 떨어져 동방사 절터는 논밭이 되고 300m 떨어진 서쪽과 1㎞ 떨어진 삼산동 뒷산에는 작은 암자터가 남아 있으며 이 동방사는 신라 40대 애장왕 때에 세워진 것으로 절 주위가 수십리에 이르고 기거하는 승려가 수백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절은 전소되어 없어지고 탑만 남았으며 지기탑(地氣塔)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성주의 지형은 소가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형상이며 남동과 북서는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이천은 성주를 돌아 동쪽으로 빠지고 있어 성주의 지기가 냇물과 같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탑이라 하여 지기탑1이라고 한다. 현재 탑의 높이는 8m이나 매몰된 기단부를 복원하면 높이가 12m에 이른다.
◇충성의 상징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성주읍 경산동 서문과 고개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영남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성주목사가 되었다가 성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제말(諸沫) 장군과 진주성 싸움을 돕기 위하여 출전하다가 전사한 조카 제홍록의 업적을 새긴 비로서 1792년(정조 16년) 당초에 성주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앞 길가에 세워졌는데 도로확장공사 뒤에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비는 높이가 2.16m, 너비 79㎝, 두께 37㎝의 비신에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고 제학 이병모가 글씨를 썼으며 성주목사를 지냈던 조윤형이 전서를 썼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서 서문고개 고개 마루 도로가에 있다. 1974년 지방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거찰 법수사(法水寺)의 자취
법수사는 당초 절 이름을 금당사라고 하여 802년(신라 애장왕 3년) 수륜면 백운동 중기마을과 그 주변 일대를 차지하고 지은 신라의 거찰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가 고개 너머에 있는 해인사와 같이 일어난 성주지방 불교의 진원지였으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 왕자 범공이 중이 되어 한때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 중엽에 절 이름을 법수사라 고쳐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조 중엽에 폐사된 절이며, 절터 중앙에 그 뒤 마을이 생겨 중기라고 부른다.
가야산 남쪽에 위치한 이 법수사는 구금당, 팔종각 등 무려 1천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 절터를 중심으로 한 백운동 골짜기 곳곳에 석탑, 돌기둥, 주춧돌 같은 유물이 사방에 산재되어 있고 법수사에 딸린 암자만도 1백이 넘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암자는 하나도 없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여기 저기 돌로 쌓아 올린 암자터를 발견할 수 있으나 암자 이름을 도은암, 보현암, 백운암, 일요암 등 말로만 전하고 암자의 터는 없다.
또 법수사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은 절이 망한 뒤에 절 뒤의 골짜기에 있는 용기사로 옮겼다가 용기사가 폐사되자 1897년(고종 광무 1년) 당시의 해인사 주지 범운선사가 해인사의 큰 법당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다시 옮겨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지존불인 비로차나불로 은행나무로써 만든 좌상인데 높이는 2.35m이다.
그리고 법수사 절터 뒤편 용기사 골짜기로 들어가는 어구에 미륵다이라 부르는 곳에 있던 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옮겨 갔고 중기마을 동편 진등부락에 있던 목 없는 석불 좌상은 그 좌대와 함께 백운국민학교에 옮겨 안치되었다.
절의 본당이 있던 곳은 지금도 거대한 바위와 수 많은 돌로 쌓아 올린 축대가 뒤쪽인 서편을 제외한 남동북 3방향으로 남아있고 축대 위는 현재 농지로 경작되고 있다. 또한 이 터전의 바로 뒤에 도로가 나 있으며 뒤쪽 봉우리는 임진왜란 때 개축한 가야산성의 석축이 1.5m 높이로 남아 있으며, 본당 터 중간에 3층 석탑, 중기마을 입구에 당간지주, 동쪽 끝 밭가에 시식대가 있다.
◇탄안마을에 복원된 보월동 3층 석탑
수륜면 보월동 탄안마을(절골)에 있다. 이 탑이 서있는 절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몽고 침입 때가 아니면 임진왜란 때 절이 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탑도 농지 가운데 그 원형주초석, 석등의 연화대석, 장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틈이 벌어지고 있는 모서리가 깨진 석탑의 기단 부분만이 본 자리에 그 모양을 드러내 놓고 그 밖의 부분은 주위 전답 속에 묻혀있다. 특히 3층 석탑 옥개석은 탑에서 50m 떨어진 도로가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탑재를 운반해 가려는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이 탑은 지반석 위에 상하 2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3층 석탑을 올린 구조로 복원하였다. 상하 기단의 면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2개씩을 모각하여 3구로 구분하고 하기단 갑석은 고각형의 2단괴임을 두었으며, 4장으로 구성된 상기단 갑석에는 각형의 2단괴임과 부연을 각출했다.
첫층 옥신석(屋身石)부터는 옥신석과 옥개석은 5단 받침과 2단괴임을 만들었고 추녀는 수평으로 하여 낙수면의 굴곡을 약하게 하였다. 3층 옥개석에는 지름 15㎝, 깊이 9㎝의 탱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상하 기단의 면석에 탱주가 2개씩 있고, 오개 받침이 5단인 점, 전체적으로 정제된 규격의 꾸밈이 단조로운 점 등으로 보아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 석탑이라 하겠으며, 선본암(禪本 ) 3층 석탑의 상기단 갑석의 폭 보다는 이 탑의 것이 6㎝나 작으면서도 탑 전체의 높이는 60㎝ 정도 더 높게 된 것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탑의 폭에 비해 탑신이 높아지는 형식의 한 예라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5.1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