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지사로 꼽히지만 이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선생을 재조명하고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된다.
지난 1일 (사)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김중위)는 서울 서초구(구청장 박성중)와 국가보훈처의 공동으로 대한민국 대표 유림으로서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헌신한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 기념관’을 건립하는 기공식을 거행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114-3번지 반포근린공원 내에 건립되는 심산기념관은 지하2층 지상3층 연면적 8,438㎡(2,553평) 규모로 건립된다. 내년 11월 개관 예정이며 200여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될 예정이며, (사)심산기념사업회, 국가보훈처, 서초구가 공동 부담하되 모자라는 부분은 민간기업체 등의 기부금으로 채워진다.
기념관은 심산 선생의 동상과 유품, 사진 및 자료 등을 수집 전시해 영남 유림의 후손으로 태어나 1962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을사오적 처단 상소,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상, 반 이승만 투쟁 등 행적을 따라가며 선생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심산기념홀’, 심산과 동시대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및 한국 근현대사를 장식한 다양한 인물에 대해 소개하는 ‘기획전시실’, 심산의 일대기 및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줘 어린이 교육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영상교육관’ 등으로 민족정체성교육의 요람이 될 수 있도록 운영할 예정이다.
항일운동과 반독재 운동을 펼친 투쟁가로서의 삶 이외에 성균관 및 유도회(儒道會)를 재건한 유학자로서,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민족사학 육성에 관심이 많았던 교육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되새겨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된다. 다양한 유학(儒學) 및 한문학 자료를 갖춘 ‘유학자료실’, 유아부터 일반인까지 한문, 경전교육, 인성교육도 함께 받을 수 있는 ‘한학교육실’, 유학자들이 입던 도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제(祭)를 올리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우리역사 체험장’, 청소년들이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는 ‘독서실’ 등도 마련된다.
이날 기공식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김중위 심산기념사업회 회장, 박성중 서초구청장 및 의회의장 의원 등 관계자와 광복회 원로회장 강영훈 전 국무총리, 서정돈 성균관대학교 총장, 신영보 보훈지청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심산 선생의 고향 성주에서 상경한 배춘석 성주문화원장의 모습도 보였고, 신동욱 재경성주문화사업후원회 회장, 최열곤 전 교육감, 이상희 전 장관, 이하영 명종설비 회장, 이윤기, 유성환, 김창환 전 국회의원 등 많은 성주 출향인사들이 참석했다.
불의와 타협 않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이름은 昌淑, 자는 문좌(文佐)이며, 心山은 그의 號이다. 또 별명을 愚라고도 했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翁 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 벽옹이라 하였다.
선생은 조선조 선조때의 학자이며, 명신인 문정공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선생의 13대 종손으로 아버지 김호림(金頀林)과 어머니 인동 장씨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민족과 국가의 대변혁기에 태어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 독재에 맞서며 일생을 바친 대유학자요 혁명가이다. 말하자면 민족적 대의를 위해 오로지 일생을 바쳤다. 철들면서부터 시작된 애국계몽운동, 국내외에서 혁명적 항일투쟁, 해방후의 반독재 민주투쟁, 분단체제하의 통일정부 수립운동 등이 그것이다.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으로 불굴의 실천과 행동주의에 일관했던 선생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진보적 유학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보기 드문 완인(完人)의 형상으로서 길이 민족의 사표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심산 선생의 생애와 활동상을 살펴보자.
노예해방계급타파 등 부친의 선각적 소견에 깊은 깨달음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던 16세 때, 어느 날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노예해방계급타파 등 선각적인 소견을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긴다. 구한말 세도재상(勢道宰相) 이유인(李裕寅)의 두 차례에 걸친 출사강권(出仕强勸)을 거절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나 성품이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선생은 스승인 동향의 대계 이승희(大溪 李承熙)선생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 선생을 따라 서울로 가서 을사늑약 체결 뒤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목을 벨 것을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08년 애국계몽운동 조직인 ‘대한협회’성주지부를 창설하고 구습과 계급 혁파에 앞장섰으며, 일진회(一進會)의 한일합방론(韓日合邦論)을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추원과 신문에 보도한 사건으로 8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국체상환을 위해 모은 기금이 친일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 동지들과 함께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펼쳤다.
일제치하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술과 통곡으로 한동안 광인(狂人)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어머니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고 비로소 독서에 전념했다. 선생의 평생 학식이 4∼5년 동안 몰두한 독서에서 이룩됐다.
심산은 1919년 3.1독립선언 직후에 동지들과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보낼 것을 모의하고, 영남·충청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이루어진 장서를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프랑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다.
이때부터 북경, 상해, 광동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이동녕, 이시영,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등과 제휴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손문(孫文) 주석, 오산(吳山)외교부장 등 중국정부의 요인들과 접촉,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얻고 각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해 망명정부 활동과 경비를 보조토록 했다.
심산은 임시정부 조직에 적극 참여하고 의정원의원(경북대표)에 선출되었다. 망명동지들을 수시로 만주와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고 연락망을 만들어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제1차 전국 유림단사건(파리장서사건)으로 500여명이 체포되는 대옥사가 일어난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 잠입과 탈출을 반복한 것이 이 시기이다. 이때 심산의 장남 환기(煥基) 씨도 북경으로 불러들여 독립운동에 가담시킨다. 그 후 국내에 밀파했던 환기(20세) 씨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옥사한 소식을 듣고 심산의 지병이 악화된다. 상해 병원에서 일경에 체포 돼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후 군자금 사건의 심문과정에서 나석주 의사를 밀파한 일까지 당당하게 밝힌다. 14년형을 받고 공소포기로 대전형무소에 이감 복역하게 된다.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으며, 병이 악화되고 결국 위독하여 형집행정지로 출옥과 재수감을 반복한다. 옥중투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형무소장에게 절하지 않고 강제로 읽으라는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찢어버리는 등 불굴의 극한투쟁으로 일관했다.
병이 위독하여 가출옥 상태에서 대구 울산 백양사 등지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등 민족적 양심을 지켜 가는 분들과 비밀리에 접촉한다. 백양사에서 요양 중 회갑을 맞았으며, 1940년 모친 별세 21년 만에 묘막에서 시묘를 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43년 10여년의 옥고를 치른 차남 찬기(燦基)를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밀파시킨다. 심산은 1944년 고향에서 요양 중 다시 독립운동 추진, 건국동맹(비밀결사)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된다.(북부책은 조만식, 중앙책은 여운형) 결국 건국동맹 사건으로 일경에 피검 되었다가 해방 후 출감했다.
민중당 당수에 추대되었으나 정당 불참을 선언하고 거절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환국환영대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때가 1945년경인데 장남의 죽음에 이어 차남 찬기마저 망명 중 사망으로 망명 동지들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심산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다 감옥을 드나들면서 모진 고문을 견뎠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두 아들을 조국독립에 바치면서까지 민족적 대의를 위해 평생을 일관했음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균관대학 설립 초대총장 취임
1946년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적극 펼치면서 난립된 유도회(儒道會)조직을 통합, 유도회 총본부로 개편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유도 진흥에 진력하며, 유도재단의 정비현대화와 함께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선생 등과 이른바 ‘7거두공동성명’을 발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6.25동란 후 인민군 측의 끈질긴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했고, 부산 피난 시절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문 사건으로 ‘인심교란죄’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52년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때 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서상일 선생 등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여 다시 옥고를 치른다. 1953년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의 초대 총장에 취임하고 국력배양을 위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반독재 민권운동 앞장
1956년 효창공원 7열사묘소이장반대투쟁위원장으로 이장반대 투쟁에 앞장서서 결국에는 성공을 거둔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 3선취임 반대 경고문을 발표하고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사임했으며, 1957년 자유당 정권의 압력과 이에 결탁한 세력에 의해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 보안법개악 반대투쟁과 반독재민권쟁취구국운동에 앞장서며 이 대통령에게 사퇴권고 서한을 보낸다.
1960년 4.19혁명 이 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를 역임했고, 백범 김구 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 기념사업회 회장, 그리고 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했다. 선생의 애국사상은 백 번 꺽어도 꺽이지 않는 백절불굴의 표상이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그 해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인생을 마감하여 5월 18일 사회장으로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영면했다. 심산문존(心山文存), 심산유고(心山遺稿) 등 저서를 남겼다.
/최종동 서울지사장jongdong44@hanmail.net
강직한 애국지사 그 이름 심산이여!
가야산 서기 받아 새 생명 태어나다
문정공 13대손 고고의 성 우렁차고
혼미한 사직광정에 때맞추어 오셨네
칠봉산 직준봉에 부엉이가 울던 밤
망국의 서러움에 몸부림치고 통곡했네
매국노 을사오적을 처단하라 상소하고
국력을 기르고자 성명학교 설립하여
향리의 준재 모아 애국기개 가르치고
국익에 배반한다면 왕명에도 불복하리
파리의 평화회의 독립청원서 보내고
1·2차 유림단사건 천지가 진동했네
이 땅의 선비들 기개 만방에 떨쳤도다
독립기지 건설코자 모금운동 전개하고
동척을 폭파하며 거세게 저항했네
왜법의 변호 거절 코 14년의 영어생활
중국을 드나들며 조국 찾아 헤매면서
두 아들 희생에다 선생은 앉은뱅이
나라의 고관대작들 이 애국을 배우시라
조국의 광복으로 새 나라를 이룩할 제
탁치와 단정반대 통일조국 외쳤건만
아직도 분단된 채로 허공에 메아리치네
힘없어 망한 나라 통일에도 국력우선
후학을 기르고자 성균대를 창설하고
내일의 통일의 꿈을 알알이 엮어왔네
부정부패 동족상쟁 준엄하게 꾸짖고
정신 좀 차리라고 비수 같은 충언으로
이승만 김일성에게 경고장도 날렸네
구국운동 60년에 건국한지 또 60년
이제 사 그의 정신 위대함을 깨닫고
본받을 민족정기의 터전을 마련하네
비운의 내 조국과 함께 한 일생이여
산 같은 부동심은 애국의 단성일세
드높은 통일자존의 가르침을 잊으랴
강직한 애국지사 그 이름 심산이여
21세기는 겨레의 정체성을 살리는
희망찬 역사창조의 큰 서원을 올립니다.
임이여 명복하소서
선생은 1879년-1962년 84세의 전 생애를 독립투사이자 교육자이며 강직한 정치인으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고 신생 대한민국건설에는 독재 부정 비리를 척결함에 부귀와 권력을 초월한 강직한 선비정신으로 일생을 희생한 백 번 꺾어도 꺾기지 않는 위대한 심산 김창숙 선생의 애국정신을 본받고 기리고자 서초 근린공원 내에 심산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기공식은 무자년 2008년 12월 1일 15시. 대지26,000㎡(7,892평), 건평8,438㎡(2,553)평으로 기념전시관 교육관 도서관을 겸한 다용도 기념관을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정부와 서초구청, 독지가의 지원으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통일조국건설의 염원을 실현할 역사교육의 요람으로 크게 역할 할 것을 기대하면서 연작 서사시조 몇 수를 엮어 영전에 바칩니다.
2008년 12월 1일
제자 시인 남주 최열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