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운(牧雲) 한인규 박사는 성주 출신의 자랑스러운 출향인으로 우리나라 교육계를 이끌어 온 거물급 인사이다. 이 책은 저자가 기복이 심한 인생을 외롭게 살아오는 동안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어낸 것으로, 학문생활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문집 전 5권 중 제1권 ‘행복은 강물처럼’에 수록된 내용이다. 멀고 험한 인생 역정을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그 길을 열어 왔는 지를 저자가 경험한 대로 진솔하게 써 내려가 잔잔한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가득 찬 삶, 선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행복은 강물처럼 밀려오고, 그 속에서 우리네 인생은 구름처럼 흘러간다”고 저자는 시처럼 말하고 있다. 【편집자 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농촌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6·25 동란 이후의 일인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형편이 좀 나아서 내 공부방에는 언제나 호야불을 켤 수 있었다. 호야불은 호롱불보다 기름이 좀 더 많이 소모되지만 그만큼 불은 더 밝은 것이다. 그때 한동네에 살던 동기생 성기수 박사는 내 공부방 단골손님이었다. 항상 같이 공부를 하는데 어떤 때는 밤이 늦으면 성기수는 우리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찍 귀가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죽마고우가 되어 일제치하 암울했던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함께 자란 것이다.
해방 직후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교과서가 따로 없던 때여서 담임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는 교재를 빌려서 성기수 박사와 내가 우리 공책에 옮겨 썼다. 그 다음날 우리는 동급생들을 위해 칠판에 교재내용을 다시 써주는 일까지 맡아 한 때가 있었다. 지금 어린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우한 학습 환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다닐 때도 성기수 박사는 자주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하였다. 성박사는 얼마나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어떤 때는 내가 자다가 눈을 떠보면 그 친구는 그때가지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끔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에 보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내 평생 이런 노력가를 따로 본 일이 없다. 수학은 언제나 성기수 박사가 1등이고 영어는 내가 그보다 좀 더 잘 한 것으로 기억한다.
성기수 박사의 초기 인생도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여러 군데를 다녔으나 졸업장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역시 그 비슷하여 졸업장을 받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는 초등학교도, 중·고등학교도 졸업을 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대학입시를 치르기 전에 오랫동안 중한 병을 앓았고 서울대학교 입학도 검정고시를 거친 다음 들어간 케이스였으니까. 이런 저런 곡절 끝에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최연소 박사학위 소지자가 되었고, 그 후 그 이름도 유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박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성기수 박사는 세상이 다 아는 유명한 과학기술자가 된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은 호롱불가의 시골 공부방 세대. 호롱불을 모르고 자란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런 옛 얘기가 무슨 뜻으로 들릴까 잠시 생각해본다.
다음 호에서는 ‘수박서리’가 이어집니다.
1934년 경북 금릉 출생
성주농업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학사) 및 동 대학원(석사) 졸업
미국 Cornell대학교 대학원(박사) 졸업
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제11대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장
제3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