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의 왜적이 대거 침입하였다. 배가 서로 맞닿아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1592년 4월 13일)
◇저녁에 성주성을 바라보니 적이 이미 성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 화염이 가득하고 불빛이 하늘에 미쳤다.(1592년 4월 27일)
◇흉악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가득하다. 대낮인데도 앞을 분간하기 어렵고, 모두가 공포에 떨며 쥐처럼 숲 속에 엎드려 있었다.(1592년 4월 28일)
◇집은 잿더미가 되고 종 은복은 포로로 잡혀갔다. 모두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1592년 4월 29일)
시공을 초월하여 417년 전 임진왜란의 한 가운데에 뛰어든 것 같은 생생한 기록, ‘용사(龍蛇)난중일기’는 암곡 도세손(운재공파)이 18세 때부터 3년 동안 겪고 본 임진란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한문일기이다.
그의 후손 도두호(54)가 임진란의 실상과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널리 알리고자 이를 국문으로 쉽게 번역해 출간했다. 제목을 ‘용사일기’로 하고, 부모를 두고 형제가 달아나기를 거절하면서 한 말 ‘우리가 헤어진다면 살아서 무엇하랴’를 부제로 달았다. 책에는 임란 초기에는 왜적의 살육과 추격으로 공포에 질려 피해 다니는 모습이, 1년여 후부터는 기아와 질병으로 생지옥을 연상시키는 기록들이 처연하게 펼쳐진다.
본사는 선대가 겪은 전쟁의 참상과 왜적의 만행을 알리고자 역자에게 연재를 요청해 성주지역 기록에 한해서 보도 허락을 득하고 이를 게재한다.
한편 역자는 인명이나 지명 번역에 착오가 있거나 새롭게 알게된 것이 있으면 이메일( doduho@hanmail.net) 또는 본사(☏054-933-6575)로 알려주기를 당부했다.
도적의 무리가 바다를 뒤덮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4월 13일
백만의 왜적이 대거 침입하였다. 배가 서로 맞닿아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태평성세를 누리며 전쟁을 모르고 살았던 터라 변방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성을 버리고 쥐 숨듯 하고, 적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적은 부산진을 함락하고 동래를 에워쌌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함락돼 죽임을 당하였다.
적의 진격 기세가 마치 기왓장 깨듯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목사(牧使) 이덕설(李德設)과 판관(判官) 고현(高峴)이 기병 5천으로 현풍에 진을 쳤지만 병졸과 인민들은 놀라 흩어지고 온통 울부짓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나와 종친들은 피난을 논의했지만 의견이 분분했다. 깊은 산은 복병을 의심하여 수색 당할 것이므로 얕은 산에 쥐처럼 엎드려 있다가 형세를 봐가며 피난하자는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빌무산(벽진, 조마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1592년 4월 20일
집안의 값진 물건은 땅에 묻고 옷과 식량을 싸 놓은 후 시춘(세순의 6촌) 형님, 김로 아재와 막걸리를 마셨다. 아재는 “이렇게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을까?”라며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다.
집안 어른과 이이들 함께 응성(세순의 재종숙) 아재 집으로 갔다. 사정을 말하니 아재는 우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으나 주변사람들은 너무 빨리 움직인다고 놀렸다. 그래도 우리는 밖으로 나와 개터(운정리, 일명 은행골) 소나무 아래서 마을을 굽어보며 ‘마을이 잿더미가 되고 조상 무덤이 황폐해 질 것’을 걱정하자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저녁 무렵 산점(개터 북쪽의 한 마을)에 도착해 머물렀다.
다음날 집안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이후 며칠 간은 적에 대한 소문이 없었다.
1592년 4월 25일
소문에 현풍이 함락됐다고 한다. 산을 오르자 이양덕 아재가 말리며 “함께 갈 곳을 의논하자”고 했으나 응하지 않고 중봉으로 올라갔다. 강의 왼쪽에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다. 배협(裵協)이 와서 방목암(放目庵)으로 가자 배가의 가족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날 이순경과 배득보가 왔다. 저녁에 배득보가 송아지 고기를 보내오고 집에서는 쑥떡을 쪘다.
1592년 4월 27일
배협과 의논해 암자 서쪽의 임시거처로 옮기기로 하고 서로 도와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저녁에 성주성(현 군청 자리)을 바라보니 적이 이미 성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 화염이 가득하고 불빛이 하늘에 미쳤다.
1592년 4월 28일
아침에 흉악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가득하다. 대낮인데도 앞을 분간하기 어렵고, 모두가 공포에 떨며 쥐처럼 숲 속에 엎드려 있었다.
잠깐사이 왜적이 산 위까지 올라와 고함을 지르고 돌을 굴리는데 그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간이 떨리고 마음이 눌려서 골짜기로 달려가는데 아버님은 길이 엇갈려 다른 곳으로 가셨으나 형님이 찾아 모셔왔다.
날이 저물어 적이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한사람이 적에게 쫓기며 달려와 급히 다시 바위틈에 들어갔다.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저물어 부막(임시거처)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단지 두 명의 적이 왔다.
적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우리를 찾고…
1592년 4월 29일
어지럽고 무서운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는 것이 어제보다 더 심하다. 새벽에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한 스님이 달려와 “적이 산 북쪽 기슭에서 수색을 하는데 살기가 등등하다. 어찌 빨리 달아나지 않느냐”고 말했다. 모두 놀라 밥 먹던 것을 멈추고 “오늘은 죽고 말겠구나”했다.
억지로 이순경을 만났다. 공보 이순경이 산중의 험하고 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잘 알고 있기에 그에게 안내를 맡기고 따라갔다. 어제 머물던 바위에서 멈추려고 하니 공보가 “어제 단지 두 명의 적을 보고 정신이 빠져 어찌할 바를 몰라 했는데 오늘은 많은 적들이 오고 있어 여기서 멈추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나뭇가지를 붙잡고 물고기두릅처럼 줄지어 산봉우리에 이르자 사방에 급히 피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후에 김우곤 어른께 피난 가서는 안될 곳을 알려드렸다. 낭떠러지 울창한 녹음사이로 밧줄에 매달려 내려가자 다쳐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멀지 않은 산점에 불길이 오르고 포성이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자 모두들 구부리고 엎드려 있었다. 작은 동생 예일이가 칭얼대서 급히 젖을 물렸다.
앞 봉우리에서 응진, 김로 아재가 구르듯 내려와서 “적들이 뒤쫓아온다”고 하였다. 모두 놀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 내려갔다. 배협의 노모와 임신중인 처는 잘 걷지 못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내려갔다.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고 망극하여 눈물이 절로 흘러 내렸다. 살티(금수 후평리)에 도착해 뒤로 나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앉았다.
배협과 형님이 염속산에 올라 적의 거취를 알아보고, 배협이 먼저 돌아와 “적은 읍내로 향했다”고 했는데, 잠시 후 지나가는 사람은 “적의 선봉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낙담하며 달아나려 했으나 형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헤어지게 되는 것이 싫어서 불안해하면서도 요행을 바랐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가련해 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쳐들어온 것으로 생각해 모두 두려워하며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적이 어디로 물러갔는지 알 수가 없고, 형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숲속에 엎드려 형님을 불러 보았으나 기척이 없다. 부모님은 화를 입은 것 아니냐고 울부짖으며 같이 죽자고 하신다. 또 배협에게 같이 오지 않았다고 나무란다. 배협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통곡하며 아래로 내려와 형님을 불렀다.
한참 후에 산 위에서 문득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바로 형님이었다. 형님을 만나보니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헤어져서 울부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형제가 방목암으로 가니 부모님과 친척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은 형의 등을 두드리며 “네가 만약 불행을 당한다면 이 늙은 애비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며 늦은 까닭을 물으셨다.
형님은 “적이 봉우리에서 오기에 나무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발자국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적 한 놈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습니다. 몸을 가볍게 날려서 등나무 줄기를 타고 암벽으로 숨었는데, 괴상한 고함소리가 나 엿보니 불과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적 둘이 있었습니다. 날쌔게 달려나와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서 붙잡히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모두 감탄했다.
네시쯤 부막으로 돌아왔다. 감춰 두었던 옷과 재물은 노략질 당하지 않았는데 말 한 필은 끌고 갔다. 노비 은지가 말하기를 “적 3명이 와서 불을 지르려하자 그 중 한 명이 말리며 ‘집 주인이 밤에 올 것이니 기다렸다가 불시에 빼앗으면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며 갔다”고 한다. 왜의 말을 알지 못하는 은지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적들이 불을 지르지 않고 비단 옷도 훔쳐가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였다.
의논 중 날이 저물었다. 한배미(벽진 봉학)의 여러 마을을 바라보니 불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왜적들이 그곳에 주둔해 있어 장차 쳐들어 올 것을 생각하며 무서움에 떨었다.
배협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쥐처럼 수풀 속에 숨어 있어야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묶여서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제안해 모두 옷 등을 버리고 빈 몸으로 험한 산길을 갔다. 비바람이 일어 허리를 굽히고 서로 붙들고 산을 내려왔다. 점촌 안봉사(安峰寺)에서 병을 고쳐준 적이 있는 계승(桂崇) 스님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가 더욱 거세어 지고 그믐달이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모이곤 했는데 동생 복일이 대답이 없다. 기다렸으나 종적이 적막하다. 배협은 가족들을 데리고 먼저 사두곡으로 향하고, 서성거리고 있다가 노비 윤금이가 복일이를 업고 먼저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떠났는데 진흙에 빠지고 넘어져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서원(천곡서원) 앞에 이르러 마을들(명리, 선학동)을 바라보니 흉악한 불길이 꺼지지 않고, 개 짓는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왜적인가 싶어 황급히 개터 종숙의 집으로 와보니 복일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복일이 달려들며 크게 기뻐했다.
노비 명복에게 집안일과 왜적의 형세를 물어보니 집은 29일 잿더미가 되고 종 은복은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모두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력이 떨어져 쉬려고 했으나 적이 올 때라는 종의 말에 지체없이 배응보의 선영으로 들어갔다. 그릇하나 가득 밥을 담아서 함께 먹었다. 큰집이 모두 불탔다. 사당은 불길을 면했으나 겨울에 잿더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