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오늘 극변을 당하여 서로 몸을 보존키 어렵다. 왜놈들은 젊은 남자를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각자 멀리 달아나서 몸을 보전하였다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너희들 한 몸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멀리 달아나거라”라고 하셨다.(1592년 4월 그믐)
◇왜적은 오직 농부만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친 옷을 입고 손에는 호미를 쥐고 다녔다.(1592년 5월 5일)
시공을 초월하여 417년 전 임진왜란의 한 가운데에 뛰어든 것 같은 생생한 기록, ‘용사(龍蛇)난중일기’는 암곡 도세손(운재공파)이 18세 때부터 3년 동안 겪고 본 임진란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한문일기이다.
그의 후손 도두호(54)씨가 임진란의 실상과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널리 알리고자 이를 국문으로 쉽게 번역해 출간했다. 제목을 ‘용사일기’로 하고, 부모를 두고 형제가 달아나기를 거절하면서 한 말 ‘우리가 헤어진다면 살아서 무엇하랴’를 부제로 달았다. 책에는 임란 초기에는 왜적의 살육과 추격으로 공포에 질려 피해 다니는 모습이, 1년여 후부터는 기아와 질병으로 생지옥을 연상시키는 기록들이 처연하게 펼쳐진다.
본사는 선대가 겪은 전쟁의 참상과 왜적의 만행을 알리고자 역자에게 연재를 요청해 성주지역 기록에 한해서 보도 허락을 득하고 이를 게재한다.
한편 역자는 인명이나 지명 번역에 착오가 있거나 새롭게 알게된 것이 있으면 이메일( doduho@hanmail.net) 또는 본사(☏054-933-6575)로 알려주기를 당부했다.
1592년 4월 그믐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눅눅하여 그 피곤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배의수의 집에 가서 불을 쬐어 옷을 말렸다. 곧 점심을 먹고, 부모님은 어린 동생을 안고 배씨의 선영으로 향했다. 나는 형님과 함께 송공의 선영으로 가서 작은 소나무 아래 앉았다. 연일 비가 내렸는데 옷은 마르질 않고 한기가 뼈에 사무쳤다,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오래라 형님은 팔을 괴고 떨면서 졸고 있어서 형님을 깨웠다. 사람들이 모두 왔다. 무덤 옆으로 징기(수촌리)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주히 달아나고, 또 말을 쫓는 자도 있었다. 형제가 서로 울며 말하기를 “저것들은 왜적이다. 오래지 않아 이곳으로 올텐데 어떻게 할까? 빌무산으로 돌아가려니 부모님이 피곤하여 억지로 걸을 수가 없고, 둘만 가자니 사람으로 차마 할 짓이 아니다. 차라리 부모님의 곁에서 함께 죽느니만 못하지 않느냐”
마침내 절뚝거리며 배씨의 선영으로 가보니 부모님과 누이, 동생이 역시 비를 맞으며 졸고 있었다. 내가 본 바를 말씀드리니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다만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라고 하셨다. 과연 오늘은 왜적이 오질 않았다.
저녁에 배의수의 집으로 갔다. 아버님과 형님은 홍필봉의 집을 빌어서 잤다. 어머님과 나는 누이와 함께 배의수의 집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촌락이 흉한 불길이 들었으나 오직 홍씨와 배씨의 우막은 보존되었다. 그래서 배응보의 모친과 그의 처자, 배득창의 처와 노비가족까지 세 집 가족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은 많고 집은 좁아서 누울 수가 없다. 모두 무릎을 맞대고 않아 있었다. 게다가 지붕이 새어 비가 물을 붓는 듯 하고, 또 마주 할 불조차 없어서 그 곤란한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한밤에 배득창이 와서 말하기를 “왜적이 사람을 죽이는 참상이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나는 처자를 버리고 멀리 달아날 계획이다. 지금 자네는 어찌 할 건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은 반드시 목이 잘릴 것이야. 딴 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몸 보전할 것을 생각하게”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라 떨고, 간담이 떨어지는 듯 했다.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는 “오늘 극변을 당하여 서로 몸을 보존키 어렵다. 왜놈들은 젊은 남자를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각자 멀리 달아나서 몸을 보전하였다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너희들 한 몸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멀리 달아나거라”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서 오래도록 산다 한들, 부모님과 함께 죽느니만 못합니다”하니 어머님은 더욱 비통해 하셨다.
홍필봉 집으로 가서 배공이 한 말을 아버님께 모두 아룃다. 아버님은 “비록 도적들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 홍필봉 역시 “자네는 배공의 거짓말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하시고 “절대 현혹되지 마라. 온돌에 편히 누워서 몸에 걸친 젖은 옷이나 말리게” 하시어 두려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과연 배공은 처음에는 멀리 숨는다고 스스로 약속하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아끼는 자식들과 모두 굴속에 들어가서는 종일토록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이 허망하고, 진실이 없음을 역시 알 것이다. 이날 배득보의 누이가 죽임을 당했다.
1592년 5월 1일 맑음
새벽에 배씨의 선영으로 들어갔다. 정오에는 읍내에 주둔한 왜적들이 금릉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는 개터의 아재 집으로 왔다. 아재의 집은 다행히 불타지 않았다,
이날 헛되이 놀라서 산에 오른 것이 세 번이다. 은복 역시 도망을 갔으나 왜놈들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왔다. 머리를 모두 깎이고 왜 옷을 입었다. 완전히 왜놈과 같다. 뜰 가운데에 엎드려서 울면서 말하기를 “처음 붙잡혔을 때 여러 왜놈들이 둘러섰습니다. 시퍼런 칼날을 내 머리에 갖다 대었을 때는, 이제는 살아서 고향마을로 가지도 못하고 주인님을 다시 뵙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비탄해 했다.
또 여종 수정은 봉명정(벽진 매수리)에 엎드려 있다가 왜에 끌려갔다. 그의 어미 애정이 그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울부짖으며 엎어질 듯 넘어질 듯 왜적의 뒤를 따라 갔다. 어떤 왜적은 칼을 뽑아서는 두들기기도 하였으나 칼날로 치지는 아니하였다. 애정은 왜장에게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들어가서 슬피 부르짖고 길길이 뛰었다. 비록 왜놈이 잔악하고 포학하여 짐승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하나 역시 모녀의 정을 느껴서인지 곧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4월 29일의 일이다. 오늘 빌무산에 묻어 두었던 옷과 돈, 서책 물품들을 되가져왔다.
1592년 5월 5일 아침에 비, 낮에 맑음
비로소 나의 관례(만18세의 생일)를 올리는 날이다. 저녁에는 모두 새 집에서 앉았다가 누웠다가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문밖을 보라하니, 달려 들어와서는 “왜적 대여섯이 징기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나가 보니 과연 그러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안고는 집 뒷산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형님이 땀을 흘리며 왔다. 왜적이 길게 늘어서서 이미 개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마산으로 달려들어가서 소나무 숲 아래 숨었다. 웅진 아재도 역시 처와 자식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숨어 들어왔다.
한참 지나자 왜적이 배의수의 집에 들어가 기왓장을 깨고, 고함을 지르는 데 숲과 골짜기까지 울렸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하며 얼굴이 파래져 ‘오늘은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응진 아재는 흙으로 얼굴을 바르고는 잠깐 피해갔다. 왜적을 따르든 이희백과 그의 종봉산, 춘손 등은 개터에서 지는 해를 가르키며 “날이 이미 저물고 길이 멀므로 속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왜적들은 곧바로 읍내 길로 내려갔다. 이때 이희백은 왜패(倭佩)를 가지고 있었다. 왜가 그것을 보았으나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저녁에 개터로 돌아온 일가들은 다음날 새벽에 증산으로 피난을 가기로 약속했다. 이 때 왜적은 오직 농부만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친 옷을 입고 손에는 호미를 쥐고 다녔다.
1592년 5월 6일
닭이 울자마자 친척 내외, 어른, 아이 등 마을 사람 모두 마흔 여 명이 함께 증산을 향해 떠났다. 한배미에 이르러서 아침을 먹었다. 서로 의논하기를 ‘오늘은 왜적이 이리저리 다니고 있으니 비록 깊은 산골짜기라도 닿지 않을 곳이 없다. 우리는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낮에 반드시 이 산을 지나고 밤을 틈타 증산으로 가자’고 계획하였다.
바로 행동으로 옮겨 중봉(염속봉산)까지 갔다. 각자 흩어져서 솥질(벽진 봉계리) 등지의 마을을 내려보았다. 연기가 솟아올라서, 이제는 기어서 가게 되었다. 고개 위에서 쉬었다. 앞산을 올라가는 사람이 여럿 있어 불러서 물어보니 흰 옷 입은 사람이 한배미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빌무산 남쪽 기슭에 숨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고 오라
하였는데 그 흰 옷 입은 사람은 여징이었다. 그는 그저께 한배미로 돌아갔었다.
또 듣기를 증산은 왜적들의 분탕질이 극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속인 것이었다. 모두 의논하였지만 별다른 계략이 나오지 않아서 다시 운곡(개터와 징기 일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것은 죽어도 고향 산에 머리를 두겠다는 생각이다.
이때 형님은 오랫동안 학질에 걸렸다. 기력이 더욱 쇠약하여 힘들어 보였으나 억지로 걸려서 갔다. 달은 이지러져서 서신에 졌다. 산길은 험악하여 많은 사람들이 절룩거리고 넘어지면서 개터에 이르니 새벽2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