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생일을 잘 타고 나야 한다면서 고사 날 행사 덕택에 내 생일잔치는 어느 해나 풍성하게 차려졌다.
요즈음 어린아이들의 생일잔치는 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개최하는 등 깨나 성대히 치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60여년 전 시골에서는 유교적 봉건사상 때문인지 겨우 어른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을 뿐 아이들의 그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생일날에 친구들을 초청해서 고기와 떡과 과일 등으로 차려진 생일 파티를 여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10월이면 상달, 추수가 끝나고 추석명절이 지나고 나면 시골에서는 가정 추수감사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고사를 지내게 된다. 손 없는 날을 택하여 동네 무당을 모셔다가 일년 동안의 농사와 여러 가지 일들을 감사하고 나아가서 가족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가정의 만사형통을 비는 그런 행사였다. 이날만은 못 사는 집에서도 시루떡과 여러 가지 적 종류는 기본이고 고기와 과일이 풍성한 날이다.
해마다 우리 집에서는 이 날을 맞기 위해서 중학생이었던 나를 옆 동네(장산동)에 사는 성참봉에게 택일사절로 보내곤 했다. 2∼3년 간 심부름을 하다가 보니 항상 고사 날은 10월 11일 아니면 12일 즉 내 생일 전날 아니면 생일날이었다.
우리 식구들이나 친지들은 일단 사람은 생일을 잘 타고 나야 한다면서 고사 날 행사 덕택에 내 생일잔치는 어느 해나 풍성하게 차려졌다. 그 덕분에 어느 해 생일 때나 나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즐거운 생일파티를 가질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런 일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 4학년이 되면서 한동안은 부모님께서 택일해오라고 복채를 주시면 이 돈을 들고 성참봉 댁을 찾아는 갔으나 가서는 그 집에 있던 내 동기 동창생인 성낙계 군과(후에 유명한 발효공학분야 교수가 됨) 만나서 노는 것으로 심부름을 대신했다. 어느 때는 저녁까지 얻어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받은 날이 여전히 10월 12일 앞뒤라고 부모님께 보고 드렸던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내가 고3일 때 어느 장날에 우리 아버님을 만난 성참봉께서 가라사대 “근년에는 왜 택일하러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라고 대답하신 아버님께서 집에 오셔서 나에게 벼락을 내리셨다. 그동안 횡령한 복채를 전액 반환하라고 하시고, 내년부터는 택일하러 사기꾼 같은 너를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복채를 반환하는 것이 좀 아까웠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 고사잔치 때 집에 없을 터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이런 사건을 모르는 순진한 성낙계 박사는 아직도 내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인줄 알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다음 호에서는 ‘반세기 전 학원 깡패’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