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전 대장리) 등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열하게 올라온다는 것이다. 급히 가서보니 깃발을 잡고 창과 극(끝이 두 갈래인 창)을 든 군사들이 부상 쪽으로 연이어 가고 있다.(1592년 5월 8일)
◇말목재(금수 명천리 소도골 북쪽)를 넘어서 곧바로 적산사(금수 어은리 사찰)로 내려갔다. 듣기로 이절의 스님 찬희가 왜적과 자주 내통하였다한다.(1592년 5월 9일)
◇사방에서 왜적이 구름처럼 모여 성에 불을 질렀다. 겁탈이 더욱 심하고, 살육이 더욱 참혹하였다. 인민들은 이고 지고, 부축하고 껴안고 하여 피난을 나섰다. 그 피난민들이 앞길에 줄을 이어 끊이지 않았다.(1592년 5월 16일)
시공을 초월하여 417년 전 임진왜란의 한 가운데에 뛰어든 것 같은 생생한 기록, ‘용사(龍蛇)난중일기’는 암곡 도세손(운재공파)이 18세 때부터 3년 동안 겪고 본 임진란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한문일기이다.
그의 후손 도두호(54) 씨가 임진란의 실상과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널리 알리고자 이를 국문으로 쉽게 번역해 출간했다. 제목을 ‘용사일기’로 하고, 부모를 두고 형제가 달아나기를 거절하면서 한 말 ‘우리가 헤어진다면 살아서 무엇하랴’를 부제로 달았다. 책에는 임란 초기에는 왜적의 살육과 추격으로 공포에 질려 피해 다니는 모습이, 1년여 후부터는 기아와 질병으로 생지옥을 연상시키는 기록들이 처연하게 펼쳐진다.
본사는 선대가 겪은 전쟁의 참상과 왜적의 만행을 알리고자 역자에게 연재를 요청해 성주지역 기록에 한해서 보도 허락을 득하고 이를 게재한다.
한편 역자는 인명이나 지명 번역에 착오가 있거나 새롭게 알게된 것이 있으면 이메일( doduho@hanmail.net) 또는 본사(☏054-933-5675)로 알려주기를 당부했다.
불탄 집터를 배회하며
1592년 5월 7일
불탄 집터에 가서 무너진 섬돌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횡거(벽진저수지와 봉학저수지에서 각각 내려오는 개울을 가로지르는 작은 수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짐) 앞의 개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갓을 벗고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다. 왜적으로 잘못 생각하고는 황급히 달려서 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님도 누이와 함께 부엌으로 몸을 숨기고 기왓장으로 몸을 감추었다. 형님은 동생 복일과 함께 갈마산에 들어가서 엎드려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개터로 돌아왔다.
1592년 5월 8일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 복례를 안고 나부산(개터 안마을인 나복실의 뒷산)에 들어갔다.
아버님은 형님과 개터에 계셨다. 시춘형님, 그의 형제의 처와 자식들, 배득창(세순의 재종숙인 몽호의 사위)의 처와 딸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서로 아무 말이 없다. 저녁에 어린 동생 복례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동생을 업고 개터로 돌아왔다. 동생을 노비 금덕에게 주고 나는 다시 나부산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들으니 산꼭대기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대마(초전 대장리) 등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열하게 올라온다는 것이다. 급히 가서보니 깃발을 잡고 창과 극(끝이 두 갈래인 창)을 든 군사들이 부상 쪽으로 연이어 가고 있다.
날이 저물어서 모두 못 둑으로 내려왔다. 못은 도여개씨의 못(벽진저수지)이다. 몽호 아재는 어린 딸을 데리고 또 산에 올라갔다. 엎드려서 구평(봉학저수지 아래 들로 추정) 들녘을 바라보니 배득창이 그의 종을 때리며 달려갔다. 왜적에게 쫓기여 달아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우리도 흩어져서 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것이 헛된 것인 줄 알고 난 후에 바로 내려왔다. 들리는 소문에 증산은 왜적의 방화와 겁탈이 닿지 않았고 사람들이 안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 아재들과 서로 의논하여 증산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1952년 5월 9일
오늘은 할아버지(도태보 都台輔)의 제삿날이다. 비록 달아나고, 숨어서 사는 세월이지만, 차마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서 단술과 떡을 마련하여 제사를 드렸다.
날씨는 이제 첫더위가 시작되고, 비 또한 바야흐로 내리고 있다. 몽호 아재(아버지 몽기의 사촌 동생)는 두 아들 시춘과 시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제사에 오셨다가 도롱이를 갖추어 입고 가셨다. 우리는 왕골자리를 맨몸에 걸치고 따라 나섰다. 말목재(금수 명천리 소도골 북쪽)를 넘어서 곧바로 적산사(금수 어은리 사찰)로 내려갔다. 듣기로 이절의 스님 찬희가 왜적과 자주 내통하였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대원령(말목재에서 적산사로 넘어가는 고개)을 지났다. 형님은 여기서 운곡으로 돌아갔다. 아버님이 몸이 몹시 편찮아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비를 무릅쓰고 진흙에 빠지면서 저녁에야 정평(금수 광산리 중평)의 이돈복(세순의 매제) 집에 이르렀다. 두 다리가 몹시 시달려서 모두 불어 텄다. 이곳에서 방을 빌어 머물렀다. 연 사흘 간 비가 왔다.
1592년 5월 12일
하늘이 흐려지고 흙비(황사비)가 내리더니 잠시 후에 걷혔다. 이봉춘이 우리를 초청하여 아침을 먹었다.
점심때에는 목사가 돈복의 빈집에 달려 들어왔다. 몽호 아재가 먼저 자리섬(대가 도남)으로 들어갔다. 아재는 중성장(中城將, 성을 지키는 장수)이다. 목의 관아에 불길한 일이 생겨서 관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목사가 자리섬을 지나도록 독려하고 있음을 전해듣고, 빈 몸으로 홀로 그곳으로 갔다. 누이도 몽호 아재와 함께 먼저 가게 하였다. 누이는 울면서 가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억지로 보냈다. 아버님과 형님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재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득구의 모친은 나의 재종고모이다. 이날 저녁 우리를 청하여 식사를 차려 주셨다.
1592년 5월 13일
다시 비가 왔다. 우리는 또 봉춘의 식사대접을 받았다. 아버님이 형님과 동생 복일이를 데리고 운곡에서 오셨다. 온몸이 비에 다 젖었다. 봉춘이 또 식사를 올렸다. 그 뜻이 정성스럽고 두터웠다. 밤에는 돈복의 집에서 잤다.
1592년 5월 14일 맑음
아침에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왜놈들 10여명이 계곡을 건너서 왔다. 우리는 정평의 뒤 개고개(대가 도남에서 가천 중산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달려서 넘어갔다. 포천 (대가천)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보니 이봉춘과 이득구가 물을 건너가는 것이 보인다. 우리도 역시 어머님을 업고 포천을 건너갔다. 봉춘 등과 앞산에 올라 골짜기 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날이 저물어 멀리 마을을 바라보니 연기가 자욱하다. 형님은 산기슭으로 내려가 길을 물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평 사람들은 목백(牧伯)이 싫어서 피난을 가는데, 이를 무고하여 피난 온 사람들을 도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돌아서 내려가는 것을 기다렸다. 저녁에 우리도 자리섬으로 가서 최망년의 집을 빌었다. 몽호 아재는 먼저 이곳에 와 계셨다.
5월 17일 맑음
왜적들이 정평에 도착하였다고 소문을 들었다. 몽호 아재 일가는 함께 신흥후산(가천 금수 경계선 봉우리 562m)으로 숨어 들어갔다. 산은 깎아지른 듯 높아서 발을 붙일 수가 없다. 바위언저리를 잡고 고갯마루까지 올라갔다. 모두가 피곤해서 그늘에 누웠다. 해는 이미 기울어 저녁이 되었다. 시춘 형님은 산 아래를 내려보더니 숲 속으로 피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숲 속으로 달려서 들어갔는데, 이것은 황급히 달아나는 자가 있어서 왜적이 오는 줄 알고 놀라서 숨어 들어간 것이다. 조금 있다가 형님이 외치는데 “이것은 헛된 일이다. 마을사람들이 시원스레 편히 않아 있더라. 너도 곧 돌아 내려가라”는 것이다. 과연 헛되이 놀란 것이었다. 바삐 달려가는 것은 잃어버린 소를 쫓는 것이었다. 이후 닷새동안은 집에 있었다.
5월 22일
빗속에 노복들이 운곡으로부터 들어왔다. 운곡은 분탕질이 날로 심하여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비는 연일 거세게 내리고, 집은 비가 새어 쏟아 붓는 듯하다. 기름우산으로 비를 막았다.
앉아서 밤을 샌지가 며칠이다. 또 송아지를 잡아서 여러 집이 함께 먹었다. 이후 며칠 간은 산에 오르기도 하고, 집에 있기도 했다.
5월 26일
신흥후산에 올랐다. 낮에 비가 올 듯했다. 나는 천천히 내려가서 옷이 젖는 것을 피하려 하였더니 도호 아재가 발끈하시며 “그게 무슨 소리냐? 바야흐로 왜적이 창궐하는데 어찌 여막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너의 말이 옳지 않다”라고 하신다. 조금 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크게 내렸다. 옷이 모두 젖어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여막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이 신흥후산에 올랐다. 이때 사방에서 왜적이 구름처럼 모여 성에 불을 질렀다. 겁탈이 더욱 심하고, 살육이 더욱 참혹하였다. 인민들은 이고 지고, 부축하고 껴안고 하여 피난을 나섰다. 그 피난민들이 앞길에 줄을 이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