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 시에 케테라고 하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남편과 영양실조에 걸린 창백해진 세 아이와 더불어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여인은 아주 부유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 신자인 프랑케 부인의 부엌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
프랑케 부인은 교회 안에서 아주 유력한 활동가였다. 돈의 힘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프랑케 부인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웃음이었다. 이 사람은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웃는 일은 딱 두 번뿐이다. 한 번은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지폐다발을 끄집어내어 혼자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셀 때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실에 내려가서 300개나 되는 딸기쨈, 포도쨈, 무슨무슨 쨈 등 쨈이 든 병의 수를 셀 때 또 한번 얼굴을 펴고 웃었다.
세를 들어 사는 케테의 남편은 그 아이들과 비좁은 방에서 함께 살면서 아이들이 떠들 때마다 프랑케 부인이 버럭버럭 화를 내고 문을 두드리고 하기 때문에 끝내는 노이로제에 걸려서 집을 나가고 만다. 그래서 케테 부인은 한 달에 한 번씩 거리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남편을 만났다. 36세 난 이 여인은 더러운 여인숙 벽에 머리를 기대고 가난과 삶의 괴로움으로 바싹 늙어버린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나요?” 남편은 말했다. “하나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인리히 뵐이 197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줄거리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한 크리스천의 탐욕과 이기심을 고발한 것이다. 주위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이웃 사람들은 다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 몰지각한 프랑케 부인은 비싼 여러 가지 쨈을 사서 먹으며, 이웃과 나눌 줄을 모르고 혼자서 그 병을 세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가서 경건의 가면을 쓰고 예배드리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성구를 만지며 기도를 한다. 하인리히 뵐은 바로 이 프랑케 부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서 현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려고 했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가면 거기 ‘살레쇼의 집’이라는 장애인 시설이 있다. 이 집은 두 다리가 없는 우 살레쇼(본명 우촌평)라는 분이 1989년에 중증장애인들을 모아서 돌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거기서 그는 의지할 곳 없는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머리를 깍아 주고 목욕을 시키고, 병이 나면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주면서 그들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
이분은 서울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개인사업을 하다가 혈액순환부전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1983년 서울시립 강남병원에서 나올 때 가진 돈이라고는 20만원뿐이었다. 그것으로 강동구 둔촌동에 허름한 셋방을 얻고, 둔촌동성당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저녁에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중풍 든 노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휠체어에 끌어안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지냈다. 그 후 이런 장애인 네 사람을 모아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그 집에서 쫓겨나 임분도 신부의 도움으로 교회 뒷산에 움막을 짓고 가정용품 장사를 해서 그들을 돌봤다. 마침내 그는 1985년 9월 하남시에 ‘작은 프란시스코의 집’을 설립했다. 무려 40명이 넘는 중증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3년 후에는 그 집을 성모영보수녀회에 인계하고 거기를 떠나 태백산 기슭 구학리로 온 것이다.
이제는 그에게 장애인용 프라이드 차가 한대 있어 그 차를 가지고 장애인들이 병이 나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누구보다도 바쁘게 장애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해왔다. 어디에서 이런 힘이 생겼을까? 오직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이다. ‘불쌍히 여김’이란 영어단어 compassion은 라틴어의 com(함께)과 pati(아파하다)의 합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프랑케 부인 같은 탐욕을 몰아내고 우 살레쇼 같이 이웃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무슨 위기인들 극복하지 못하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기적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