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농사가 끝나고 모심기도 거의 끝났을 무렵 어느 장날, 윗동네에 사는 농부아저씨 한 분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렸고 노래를 부르면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가 불렀던 노래의 곡조는 슬펐고 그 가사는 대략 이러하였다. “어떤 놈은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데, 어쩌다가 이 내 신세는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나의 가슴을 찌르는 슬픈 노래였다. 그를 연민의 정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그 농부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금년 보리농사가 잘 되어 자기 목표에 이를 줄 알았는데 비료를 넉넉히 뿌리지 못하였더니 소출이 반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비료 살 돈이 없었던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었다. 오늘 보리 한 자루를 메고 와서 팔고 그 돈으로 아들 놈에게 사주기로 약속한 고무신 한 켤레를 사고, 온 식구가 지난 몇 달 동안 먹어보지 못한 안동자반 즉 간고등어 한손(두 마리)을 사고났더니 돈이 몇 푼 남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남은 돈으로 술도가에 가서 술 반되를 사고 소금을 안주로 오랜만에 막걸리를 즐겼다고 한다.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면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 뭣 하느냐는 탄식이었다. 그는 인생이 무엇이며 살기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면서 삶의 회의를 토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감수성이 예민할 때여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농민의 백년 묵은 이 가난을 물리치고 미개한 농촌의 원시적 삶을 개선하는 일에 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 내가 농과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인 것이다. 이 무렵 농토는 관개시설이 되지 않는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비가 자주 오면 농사가 풍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 하늘이 풍·흉년을 결정하는 때였다. 산은 있으나 나무가 없어서 비가 오면 곧바로 사태로 이어졌고, 떠내려 오는 모래로 낙동강의 하상은 해마다 몇㎝씩 올라갔다. 큰비가 오면 어디에 수해가 나고 어디로 새 강이 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 뒤 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시원서를 내게 되었다. 농대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더니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농업과목을 가르치는 담임선생님께서 강력히 반대하시는 것이었다. 농사짓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농촌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 것인 줄 내가 몰라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고3때 서울대학교 입시원서를 사러 가는 L친구에게 내 것도 한 장 사달라고 해서 담임선생님에게 원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너같이 성적이 우수한 녀석이 의대, 상대나 법대에 갈 일이지 왜 농대를 가려고 하느냐? 아버님을 모시고 와서 상담을 하자고 하시면서 반대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농대에 가지 않으면 진학을 포기하겠다고까지 강하게 나갔다. 결국 나는 농대로 가겠다는 뜻을 이루었다. 세월이 많이 간 다음 그때의 내 생각이 결코 이상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때 원서를 사다준 L친구는 서울대학교 진학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서를 얻어서 낸 나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졸업 후에는 그 대학에서 교수생활까지 했으니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요즈음 학생들은 담임선생이 수능 성적 순위로 가는 대학을 결정해 준다는데 나는 내가 원해서 농대를 갔으니 앞으로는 이른바 소신지원을 하는 학생이 많아 졌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캠퍼스나 학술단체에서 흔히 전공이 다른 교수들을 만난다. 기초과학이며 인문사회학이며 의학을 전공하는 분들도 제 각기 자기전공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심지어 농학을 전공하는 우리들을 조금은 깔보기까지 하는 것이 예사다. 그래서 많은 농과대학교수들은 열패감에 사로잡혀 탈 농학을 생각하는 교수들이 없지 않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농민들은 다른 계층의 사람보다는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농촌은 도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후진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일생을 자랑할지언정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갇힌 자와 소외된 사람들까지 함께 할 수 있다면 나는 더욱 행복한 사람일 터인데… 다음 호에는 ‘밤을 까주던 여학생’이 이어집니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