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한창인 5월의 마지막 날 유서 깊은 안동 땅을 탐방할 기회를 가졌다. 양반고을로 이름난 안동에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있으나 그 중에서 특출한 인물 두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퇴계 이황선생과 서애 유성룡선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탐방을 통하여 나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자랑스런운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라 하면 그 영정이 천원 권 지폐에 실려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산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현실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하며 성리학을 대성하여 이웃 일본에 까지 명성이 알려진 학자이다. 그리고 서애 선생은 퇴계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을 수습한 명 정승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뛰어난 인재 발탁 능력과 탁월한 국방 대처 능력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징비록 하나만 하더라도 참혹했던 임진년과 같은 전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저술한 것이지만 서애가 타계한지 400년이 흘러간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상은 임진년 못지않게 심각하다. 변절과 배반 후안무치가 횡행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한심한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서애 선생을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의미는 오늘 날의 위정자가 서애가 가졌던 혜안을 한번 쯤 가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 아닐까? 현 사회가 류성룡선생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뜻은 임진왜란을 앞장서서 극복한 조선시대 최고의 재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기록한 징비록을 통해 현재의 난국을 극복해야 할 우리 후손들에게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며,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현 세상은 보편과 합리의 정서보다는 편협과 아집의 정서가 판치는 세상이다. 소수의 큰 목소리가 마치 다수의 목소리인양 과대포장 되고 진실과 정의보다는 위선이 행세하고 소통보다는 단절이 지배하는 혼란과 혼돈 그 자체다. 세계120여국이 수입하여 먹고 있는 쇠고기가 한국 사람에게만 광우병을 옮겨 몰살시킨다는 촛불시위에 덩달아 부추기는 위정자들의 추태를 바라보았다면 서애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지금 서민의 생활은 유가와 물가고, 환율파동과 금융위기 등의 어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자성하는 위정자는 없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애의 혜안과 판단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자 김휘동 안동시장이 바쁜 틈을 내어 친히 도산서원을 안내하면서 설명해 주었다. 도산서당 앞 바른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식수한 금송 한 그루가 서있다. 이 금송은 유신독재자가 심은 것이라 하여 한때는 베어 없애야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존하게 된 비화를 듣고 보니 참 잘한 것 같다. 점심때가 되어 찾아간 곳이 헛제사밥집이다. 이곳 양반의 후예들은 이곳 지형지물을 이용해 아주 오래부터 고유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많은 유학자들은 이곳을 유교 문화의 본고장으로 키워 선비 정신을 한국의 얼로 지켜왔고 유형무형의 전통 문화의 유산들이 고을 곳곳에 보존되어 있다. 안동 차전놀이, 놋다리, 하회별신굿, 하회탈, 안동 간고등어, 헛제사밥 그리고 도산별시로 재현되고 있는 전국한시백일장등은 모두가 조상의 숨결을 오늘에 되살린 것들이다.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등의 각종 산나물과 삶은 문어와 향토술이 고풍 당당한 사기그릇에 그득하게 차려진 헛제사밥으로 공복을 채우고 하회마을로 이동했다. 하회마을은 마을전체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보, 보물, 중요민속자료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징비록과 하회탈과 고택 등은 이 마을의 자랑이었으나 서애 선생의 13대 종부 박필술여사(2008. 10. 22 타계)와 14대 종손 류영하 선생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한다. 이 후예들은 유성룡 선생의 400주기를 맞이하여 임진왜란 당시 일본 8군 총사령관의 후손 이사누마 히데도요와 조선의 원군이었던 명나라 장수 이 여송의 후손들을 초청하여 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서애 선생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 등의 후손들이 다함께 모여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면서 화해의 불길을 점화한 장본인이다. 위정자들이 감히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해낸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73회 생신날 하회마을을 내방한 여왕의 영접 비화를 듣고는 그 후손들이 더욱 자랑스럽다. 영국여왕이 충효당 입실을 수없이 요청했으나 후손들은 충효당에는 아직까지 치마 두른 여인은 들어가지 않았다는 불문율을 내세워 거절했다고 종부가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여왕의 영접행사는 내당에서 치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충효당 앞뜰에 여왕이 기념식수한 구상나무가 외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평생에 처음 신발을 벗고 올랐다는 안방 대창마루 밑에는 발디딤 목과 손잡이 밧줄이 기념물로 남겨져있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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