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 청장년 시절의 도은 이숭인
2. 고려말 격변기를 살다 간 도은 이숭인
3. 도은 이숭인 선양사업을 위한 움직임
4. 타 지자체의 성공적인 현창사업 사례
5. 도은 이숭인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 숙옹부승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와 같이 제1회에서는 문사와 경사에 탁월한 능력으로 어릴 적부터 남다른 삶을 산 청장년기 시절의 도은 이숭인의 발자취를 돌아봄으로써 자라나는 지역 청소년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전하고자 한다.
진덕박사, 예의산랑, 예문응교 등 역임
국가와 민족에 절의와 충정을 다 바쳐
도은 이숭인은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로 삼은의 한 사람이고 시인이다. 그는 여말선초의 험난한 정국에서 명분을 중시한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그 뿐만 아니라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외교문서를 전담함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도은 이숭인 선생의 생애와 학문 논문집에 따르면, 선생의 본관은 성주이며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용산리(지금의 성주읍)에서 아버지 성산군 원구와 어머니 언양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 언양김씨가 항상 선생의 형제를 훈계해 말씀하기를 "몽가(어릴 때 선생의 이름), 너는 쉬지 않고 힘써 배워야 할 것이다. 보한(선생의 아우인 이숭문의 어릴때 이름), 너는 무(武)를 닦아 활을 쏘고 말을 다룸에 마땅히 남보다 앞서야 할 것이다. 의복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니, 사치해서는 아니 되고 음식은 굶주림을 면하면 될 것이지 색다른 것을 찾아서는 아니된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현숙한 어머니가 있어서 현철(賢哲)한 아들을 만든다고 했듯이, 선생의 성장에 끼친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의 어머니 언양김씨는 현숙한 부인으로 효성이 뛰어났으며 화려한 사치를 배격하고 방적에 힘썼고, 이른 새벽에는 금강반야경 등을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선생은 어머니와 조부의 교육을 통해 가치관 형성이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정환경은 후에 선생의 윤리 의식과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공민왕 9년(1360)에 나이 14세로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남양홍씨 판윤 홍사보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16세가 되던 1362년에 문과에 급제, 21세가 되던 1367년에 태학(지금의 국립대학)의 교수로 임명돼 진덕박사를 겸하며 문학을 진흥했다. 특히 이때 이색·정몽주 등과 함께 학문을 강론했다. 또한 선생은 명나라 태조가 건국해 국서를 보내왔을 때, 왕명으로 그 답서를 지었다. 또 1371년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25세로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해 보내지 않았다.
진덕박사,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 등과 함께 성균관 학관을 겸하고 세자사부로 직접 강론에 참가했다. 공민왕이 1374년 암살되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29세(1375)에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이 됐다. 이때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이 심했는데 선생은 김구용·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득세로 한때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31세인 7월에 즉 1377년 우왕 3년에 다시 부름을 받아 성균사성, 우사의대부를 거쳐 밀직제학과 예문관제학으로 정몽주와 함께 극조실록을 편수했다.
1388년 우왕 7년에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과 명나라 사신을 죽인 일로 고려 조정을 너무 크게 탈을 잡으므로 왕명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답서를 지어 바쳤는데 그 글이 너무 명문장이라 명나라 태조가 감탄해 공민왕에게 시호를 내리고 우왕의 왕위계승을 허락하며,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도 많이 줄이는 등 선생의 문장 덕으로 어려운 국제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명나라 황제가 선생을 한 번 보기를 원하므로 39세인 9월 즉 1386년 우왕 12년에 문하평의 김진과 함께 정조사가 돼 명나라에 가니 명나라 황제가 선생에게 관복을 주고 명나라 고관들과 한자리에 서게 하는 두터운 대우를 받기도 했다.
또 명나라의 명사들을 모아 선생과 함께 시험을 했으나 선생의 재질이 단연 뛰어나서 황제는 관위에다 백옥을 얹어 문창성임을 표시하고 관복 1벌, 벼루 1개를 하사했다.
41세에 귀국한 선생은 정몽주와 의논해 이 영광을 고려의 조정에 나눠 가지려고, 황제께 이 관복을 고려에서도 착용하도록 청해 허락을 받았다. 즉 백관의 관복을 중국의 제도로 개정할 것을 건의하고 사대부의 사당에 제사지내는 일도 함께 건의한 것이다. 선물로 받아온 금지팡이는 난리 통에 잃어버렸으며 벼루는 지금도 후손인 성주 이씨 종가에 보관돼 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명나라 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했고, 선생이 주장해 종묘 및 사대부의 제의를 실시하게 됐으며 예기를 판각으로 인쇄해 풍속을 바로 잡았다. 따라서 고려왕조를 새로 일으키기 위해 사회제도 전반의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은 고려 말의 시대적 전환기에 이색의 성리학을 정통으로 이어 받았으며, 문장에서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렬과 절의를 끝까지 지킴으로써 고려의 충신으로 한 시대를 지탱하고자 하는 실천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애국충절지사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을 `삼은`이라 일컫는다.
선생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우리 고장 성주가 낳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고 고려 말기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빼어난 문학적 소양으로 인해 역사·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에서는 선생을 삼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다.
삼은은 생년월일에 따른 것이며 생을 마감한 순서에 따라 삼은각에서 봉향하는 포은, 목은, 야은을 삼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야은 대신 도은을 삼은에 포함해야 한다는 반론이 여러 학자와 교수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도학적인 입장에서는 야은 길재 선생을,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도은 이숭인 선생을 일컫는데, 충절문제를 감안한다면 도은이 삼은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도은 이숭인 선생이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매를 쳐서 죽이는 형벌) 당해 제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삼은`으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취재2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