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 청장년 시절의 도은 이숭인
2. 고려말 격변기를 살다 간 도은 이숭인
3. 도은 이숭인 선양사업을 위한 움직임
4. 타 지자체의 성공적인 현창사업 사례
5. 도은 이숭인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창건이라는 역사적 대전환기에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애국충절지사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도은 이숭인은 유배 및 감금 등 비운의 삶을 반복하다가, 결국 조선이 건국되자 유배 도중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게 처형됐다.
이에 제2회에서는 고려에 대한 지조와 충절로 점철된 도은 이숭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암울했던 고려말 시대를 들여다보고, 지역민에게 고려말 조선초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본다.
고려를 지키려다 정적에 의해 피살돼
성주의 올곧은 선비정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 기록돼
40세 이후 선생의 삶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기구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1386년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인임의 인족으로 몰려 유배됐다. 1388년 정도전 등이 우왕을 강화로 내쫓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 선생은 창왕(우왕의 아들)을 세웠다. 1389년 창왕 1년(공양왕 1년)에 이색, 김사안과 함께 재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예문관제학이 돼 박천상, 하륜 등과 함께 영흥군 왕환(공양왕의 당숙, 선생과 인척관계)의 유배 및 일본 표류 사건(영흥군 왕환이 무릉도로 유배됐다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헤맸으나 일본에서 발견, 종실들의 증언으로 다시 되찾음)의 진실 여부를 조사하다가 무고를 이어 극형을 받게 됐으나 시중 이성계, 이림 등의 주선으로 풀려 나왔다.
이후 첨서밀직사사를 거쳐 서연관이 됐다. 그러나 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해 사신으로서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점, 선생의 어머니 상중이였을 때 과거시험의 시관이 됐던 점 등이 불충·불효라 해 이성계 일파의 탄핵을 받아 경산부(성주)로 유배됐다. 이 시기는 이성계 일파가 병권을 완전 장악했는데, 선생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서 역경의 길을 걸었다.
44세에는 오사충이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고 하며, 이를 반대한 이색 등 중신들이 살해되고 우현보 등은 유배됐다"고 무고를 했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가 있던 사신 조반의 귀국 보고에서 드러나 선생과 이색, 권근 등 중신들이 옥에 갇히는 윤이·이초의 옥사가 벌어져 청주옥에 갇혔다가 45세 때 풀려 나오고, 그 해 11월에 동지사사가 되고 정몽주와 이색과 함께 국조실록을 편찬하게 됐다.
46세 되던 해 정월에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가 됐으나, 4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해주에서 요양하는 것을 정몽주와 의논해 이성계를 죽이려다 발각돼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했다. 선생은 붙잡혔으나 풀려 나와서 고향에 돌아와 남화관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8월에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 의해 전라도 남평(지금의 나주시)에서 조선 개국 후 살해됐다.
선생은 1392년(태조 원년) 향년 46세를 일기로 고려의 국운과 함께 순국했다. 그후 1401년(태종 1년)에 벼슬을 다시 내리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했다.
1656년(효종 7년) 충현사에 배향하고 개성의 두문동서원에 72현 중 한 사람으로 올렸다. 태종이 권근과 변계량에게 명해 선생의 문집 2권을 발간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임금으로 받들어 모심)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 속에서 이색 등과 입장을 같이해 오사충 등의 탄핵을 받아 유배됐다. 이후 `이초의 옥` 사건으로 청주옥에 갇혔었고, 다시 정몽주와 같은 입장에서 고려 왕실을 부지하려다가 정도전의 세력에 의해 제거됐다. 46년의 길지 않은 삶 가운데 5번에 걸친 유배 생활로 인해 정치적 좌절과 불우함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신진관료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했다가 고려왕조의 패망과 함께 정적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선생의 절의 정신은 후세까지 추앙받고 있다.
또한 선생은 성리학의 보급에 앞장선 성균관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문한의 직임을 주로하고 외교문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스승 이색의 성리학을 정통으로 이어 받았으머, 문장에서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선생은 고려말기 시대적 격변기에 충절과 도학 및 문장으로 명예를 드높인 인물이며, 또 여말에 수용된 성리학은 이론적·철학적인 면보다는 실천·윤리적인 면이 더 강조되는 추세였는데 이를 충절로써 실천한 대유학자였다.
한편 현재 선생은 고려 삼은으로 추숭되고 있으며, 아들은 이차약·이차정·이차개(정언) 등이고, 딸은 한천동(지중추)·허현에게 시집갔다. 선생의 저서로는 도은선생시집(도은집)이 있다.
취재2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