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 순서
1. 국내 유일의 왕자태실 군집지, 세종대왕자태실
2. 세종대왕자태실의 현주소
3.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향한 움직임
4. 타 지자체 세계문화유산 등재 선행사례
5. 세종대왕자태실, 세계화를 향한 날갯짓
성주군이 세종대왕자태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드라이브를 걸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성주군은 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에 세종대왕자태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학술용역을 의뢰한 것을 시작으로, 세종대왕자태실의 본격적인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국가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자태실은 전국에 산재한 태실지 가운데 최대 규모이자 유일한 왕자태실의 완전한 군집지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며, 성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단연 손꼽히고 있다.
이에 제1회에서는 국가사적인 세종대왕자태실의 조성 과정 등 역사적 배경·기원과 설립 목적을 통해 생명존중의 공간인 태실의 보편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 소중히 여겨왔다.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믿어 태를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이때 소위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태실은 우리 조상의 장태문화가 빚어 놓은 문화유산으로 전국 200여곳에 산재해 있다.
아울러 태실 가운데서 태봉은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한 경우, 그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를 세운 것으로, 다시 말해 임금의 태실을 뜻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 정상에 있으며,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군집하고 있다.
태실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즉위)에 반대한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돼 남아있지 않다.
특히 훗날 왕이 된 세조의 태실 앞에는 특별히 귀부(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를 마련해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워뒀다.
태실의 주변 환경을 살펴보면, 동북쪽의 명산인 선석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솟아오른 봉우리(태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이 자리한 봉산 주위로는 좌청룡 우백호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봉산을 두 팔로 안 듯이 돌려져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태실의 수호 사찰인 선석사와 주변의 청정한 환경 등이 어우러져 성주를 대표하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977년에 태실을 정비하던 중 분청인화문개, 분청인화문완, 평저호, 지석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했다고 한다.
풍수 전문가들은 "세종대왕자태실은 산 사람의 거주지를 뜻하는 양택의 기를 받는 곳"이라며 "네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이는 곧 천·지·인이 한 곳에 있다는 조선시대 우주관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1920년대 말 당시 일제는 태실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지금의 고양시)으로 옮겼는데, 이는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민족 혼을 훼손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온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은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문화재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