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조선 유학사의 큰 획 `영남 오현` 2회 신동으로 불리며 성장한 한강 3회 존경 받는 공직자의 삶을 살다 4회 귀향한 한강 정구와 회연서원 5회 한강학파의 등장과 확산 6회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리다  성주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인물로 한강 정구 선생(1543-1620)을 첫 번째로 꼽는 사람이 많다.  한강 선생은 선조~광해군대에 활동한 조선중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관료였다. 그는 이황·조식의 수제답게 한국유학사에 빛나는 다수의 명저를 남겼고, 무려 340여명에 이르는 문인을 양성함으로써 조선후기 사상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가졌다.  특히 근기실학의 체계를 수립한 한강 선생은 김굉필ㆍ정여창ㆍ이언적ㆍ이황 등과 함께 영남 오현으로 일컬어진다.  성주문화원 관계자는 "한강 선생이 영남의 대현으로 500년 유학사에 뚜렷한 존재가 되었던 것은 남다른 천품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학문 수양도 있었겠지만, 당시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던 퇴계와 남명 두 스승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던 진취적인 태도가 바탕이 된다"고 말했다.  당시 영남 상도는 퇴계를 중심으로 하여 인이 위주였고, 영남 하도는 남명에 의해 의를 위주로 하고 있었다. 한강은 퇴계와 남명 두 스승에게 학문을 배워 익혔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대성시켰다. 원래 한강은 천성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나 체질적으로 남명과 닮았지만, 학문 태도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다고 전해진다. 이른 바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을 더했던 것이다. 훗날 퇴계학의 탁월한 계승자로 이름을 알린 한강 선생은 전국적으로 342명에 이르는 제자를 길러냈고, 이는 당시 영남 인사의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낙동강 상류에서 일어난 퇴계학을 낙동강 중류 지역에 퍼뜨리며 그의 학맥을 서울의 미수 허목과 안산의 성호 이익에게 이어지게 하여 근기 지역에서 일어난 경세치용의 실학 연원을 퇴계학에 닿게 한 점에서 그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한강은 예학에 특히 밝아 영남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선비들이 예학과 관련해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은 예와 관련된 대표적인 저술이자 영남 남인의 예학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손꼽힌다.  이처럼 한강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 4명과 함께 영남 오현으로 일컬어 지게 된다.  한훤당 김굉필은 소학을 자기수양에 으뜸으로 삼았다. 한훤당은 도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소학으로의 집중이었음을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소학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으며 소학의 내용을 몸소 실천했던 인물로서 관직에 있을 때에도 송사를 처리하면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그의 강학에는 늘 많은 학생들이 몰렸었다. 이는 퇴계, 남명, 율곡 선생에 의해 조선의 도학을 선도한 선각자로 추앙받았고 조선시대 정신적 스승으로 칭송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뒤틀린 사회에 짓밟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세상을 바로 잡아보겠다던 그의 맑은 소학 정신은 현재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다음은 김굉필의 절친한 벗이었던 일두 정여창이다. 정여창 선생은 김굉필과 함께 도학의 개창자로서 평가되는 인물이다. 주계군 이심원이 왕에게 상소할 때 정여창을 성현의 무리라고 일렀을 정도로 도학에 출중했고, 성종에 의해 성균관 유생들의 선생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이기론과 마음의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였고, 정여창의 성리설은 조선의 성리학사에서 다양한 관심 속에 지속적으로 논의 되었다. 무오사화로 인해 종성으로 귀양간 후 6년 뒤 죽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학문과 행실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모든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회재 이언적은 사림정치의 이상 실현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관료 학자였지만, 김일손, 조광조 등과 달리 온건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이는 온건한 성품 탓도 있지만 강경하게 대응했다 하더라도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사림파의 영수였다는 점에서 사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학문의 핵심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황이 "우리 도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의 그릇된 주장을 물리쳤으며, 정미함을 꿰뚫고 상하를 관철하여 그 주장이 조금도 흠잡을 데 없어 바른 도에서 나왔다"고 탄복할 정도로 탁월한 논문을 썼던 이언적은 이미 청년기에 성리학 전반에 대해 높은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었다. 또한 경학 연구에 있어 자주적이고 독착정으로 수행하였기에 주자의 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관점과 맞지 않으면 취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 맞게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경세가로서 뿐만 아니라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철학자로 영남 오현에 들게 되었다.  마지막은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퇴계 이황이다. 동양의 주자로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성리학을 체계화한 그는 도산 서당에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 냈으며,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인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대상이 되었다.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강 정구 선생을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 함께 5현으로 꼽기도 하고, 동향의 친구이자 문신이었던 동강 김우옹과 함께 이강(二岡)으로 부르기도 한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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