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조선 유학사의 큰 획 `영남 오현`
2회 신동으로 불리며 성장한 한강
3회 존경 받는 공직자의 삶을 살다
4회 귀향한 한강 정구와 회연서원
5회 한강학파의 등장과 확산
6회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리다
한강 정구는 조선 중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1543년(중종 38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유촌에서 태어나 1620년(광해군12)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강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김굉필의 외증손이다. 본관은 청주, 아버지 사중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함으로써 출신은 성주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이고, 아버지는 충좌위 부사맹 사중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환(煥)의 딸 사이에서 전형적인 조선의 지배신분층인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김굉필은 김종직(1431~1492)을 이어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이었으니 한강의 이런 가계적 학문 배경은 흔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의 학문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총명함이 뛰어났던 한강은 5세 때부터 보는 사람마다 영특함에 놀라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7세에 벌써 대학, 논어의 뜻을 이해하며 독서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러나 9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이 급격히 기울었고, 26세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렀다고 하니 어린 시절 가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2세 때에는 공자의 초상화를 벽에 붙여 놓고 매일 절을 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과거보다는 성현의 도를 후대에 전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수업의 길에 들어선 것은 13세부터이다. 그에게는 종이모부가 되는 남명의 고제(高弟) 덕계 오건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했던 것이다. 13세에 오건에게 주역을 배우면서 건곤(乾坤) 2괘를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우쳤다는 일화도 있다.
한강은 외가에서 자라며 오건의 부인 이씨의 보살핌을 받았고 그녀를 친어머니 같이 여겼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오건과 인간적 학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강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던 퇴계, 남명 두 스승을 찾아 스스로 배움을 청했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구에게 주역을 처음으로 가르쳤던 오건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이황과 조식을 나란히 스승으로 모셨다. 21세 되는 1563년에는 퇴계를 찾아 도산 문하에 발을 들여놓으며 성리학을 배웠다. 3년 뒤인 24세에는 조식을 만나 출처에 대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제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학문적 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퇴계에 의하여 영남 상도는 인을 중시하고, 남명에 의하여 영남 하도는 의를 중시했는데 일부 학계에서는 퇴계의 유화를 바다의 넓음에 비한다면, 남명의 기질은 산의 높음에 견줄 만한 것이라 칭하며 이 시기에 우리나라 유교적 문화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퇴남학은 한강의 두 스승인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한 용어로 한강학은 이 두 학문을 회통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함안을 빛낸 인물 한강 정구 선생`을 주제로 매년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는 함안군의 문화원 관계자는 "기록에 의하면 한강 선생은 `소년시절 주부자의 명당실기를 읽고 `경`과 `의`의 두 자가 학문을 하는 데에 중요한 방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내심 기뻐하였다. 명당실기에서 논한 대학, 중용, 태극도설 등에 관한 말을 병풍에 나열해 놓고 본다면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받들어 따름으로써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헤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해진다"며 "한강은 성실, 즉 성인의 경계를 간절히 원했으므로 군자의 길인 `경의`의 길을 가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중기 성주를 대표하는 대학자인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퇴계와 남명의 두 사문을 동시에 출입하였으며, 두 사람의 배출은 이후 성주가 영남학파의 중요한 근거지로써의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