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조선 유학사의 큰 획 `영남 오현`
2회 신동으로 불리며 성장한 한강
3회 존경 받는 공직자의 삶을 살다
4회 귀향한 한강 정구와 회연서원
5회 한강학파의 등장과 확산
6회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리다
한강의 관향은 서원의 대성(大姓)으로 이름난 충청도 청주였다. 청주의 옛 이름이 서원이었기 때문에 족보나 문집 등에서는 간혹 서원이란 별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대로 고려조에 벼슬하던 한강의 집안인 청주정씨는 무반(武班)으로 시작해 점차 문반(文班)으로 도약하며 발전한 집안이다.
한강의 부친인 사중(1505~1551)이 성주이씨를 아내로 맞아 처가가 있던 성주로 이사하면서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정구의 큰형인 정조(鄭造)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중형 정곤수는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고위직인 예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냈으며 관리로서 뛰어난 능력을 떨쳤다. 한강은 삼형제 중 막내였다.
21세 되던 해 봄에 한강은 63세의 퇴계를 찾아가 하루 동안 성학(星學)을 하는 순서와 방법을 배웠다. 퇴계는 한강이 `학문에 뜻을 두고 선한 행실을 좋아하는 유풍을 이어받았음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지나친 영민함이 도리어 단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퇴계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이후 한강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7년 동안 서신을 통한 가르침을 구하며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퇴계를 만났던 그해 가을 진사시에 합격한 한강은 이듬해인 1564년 봄 회시(會試)에 응하였지만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은 채 돌아온 뒤 성리학 탐구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24세에 남명 이식에게서 출처가 선비의 입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됨을 배웠다.
한강 정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퇴계와 남명이 1570년(선조3)과 1572년(선조5) 차례로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약 10년 동안은 두 선생에게서 한강의 학문적 정체성과 교류의 범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때 한강은 동강과 각별한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고 퇴계의 문인 조목·유성룡·김성일, 남명의 제자 정인홍·김면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퇴계와 남명이 세상을 떠난 후 선생은 창평산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라 이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본격적인 저술활동과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조정에 머물던 친구 동강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 건원릉참봉, 사포서사포, 의흥현감, 종부시주부, 삼가현감, 지례현감 등의 관직에 연이어 임명되었지만 한강은 이를 모두 사양한 채 제자들을 모아 소학(小學)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와 같은 수학의 기간을 거친 뒤 한강이 38세가 되던 1580년(선조13) 봄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2년여의 짧은 관직을 접고 1582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한강은 41세 때인 1583년 회연초당을 지어 그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 백매원이라고 하였다. 회연초당에서 문인들과 학문에 정진했으나 이후 율곡의 거듭된 천거로 1584년 동복현감으로 임명돼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586년에는 함안군수로 부임했다. 현재도 경남 함안군 무진정(無盡亭,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에서는 매년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고유 민속놀이인 낙화놀이가 열리고 있는데, 함안군수로 부임한 한강이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낙화놀이를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연등과 연등 사이에 참나무 숯가루로 만든 낙화를 매달아 이 낙화에 불을 붙여 꽃가루처럼 물위에 날리는 불꽃놀이는 보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금지됐다가 1985년부터 재현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낙화놀이는 불꽃 점화를 시작으로 가야금 병창, 장고춤, 사물놀이, 클라리넷 앙상블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진행된다.
올해도 석가탄신일인 5월 25일에 제24회 함안읍성 낙화놀이가 열렸다. 함안읍성낙화놀이 보존위원회 손인배 위원장은 "낙화놀이를 보신 분들은 무진정을 둘러싼 신록과 달빛, 봄밤의 정취, 여기에 수천송이의 불꽃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그림 같은 세상을 눈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감동을 전했다.
그 옛날 한강 정구 선생이 최초로 시작한 낙화놀이가 오늘의 경남 함안에서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운 불꽃으로 피어난 사실이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1588년에는 통선랑으로 승진했으나 이어 귀향했고, 1591년 11월 통천군수가 될 때까지 학문에 정진했다. 한강은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의 외직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부임지마다 서원을 건립하고 향약을 시행하는 등 향촌사회의 교화에 힘을 쏟았고, 각지의 연혁과 물산, 인물과 역사 등을 정리한 책을 편찬해 후대에 전하고 있다.
통천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을 맞은 한강은 각 고을에 문서를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적을 토벌했다. 이때 선조의 친형 하릉군이 전쟁을 피해 통천 산골에 숨어 있다가 왜군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한강이 하릉군을 밀고한 범인을 체포하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내 장례를 치룬 공로를 높이 평가받아 통정대부로 승진된 일화도 있다. 한강은 1600년 형조참판에 올랐지만 이듬해 곧 사직하고, 1602년 충주목사로 잠시 있다가 이듬해인 1603년 9월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강이 창녕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사실에 관해 율곡은 경연일기(經筵日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구를 창녕현감으로 삼았다. 정구는 예학에 힘써 몸가짐이 엄숙하였으며 의논함이 뛰어나 맑은 이름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명을 받들었다"
경연일기에 나타나는 율곡의 인물평은 매우 신랄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가혹한 평을 하며 단점을 지적하곤 했으나 한강에 대해서만은 별다른 비판 없이 우호적인 평가만을 기록했는데 서인에 속한 율곡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당시 그에 대한 신뢰와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4편에서는 수륜면 신정리 양정마을 봉비암 아래에 한강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회연서원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