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조선 유학사의 큰 획 `영남 오현`
2회 신동으로 불리며 성장한 한강
3회 존경 받는 공직자의 삶을 살다
4회 귀향한 한강 정구와 회연서원
5회 한강학파의 등장과 확산
6회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리다
한강은 가야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대가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젊은 시절부터 가야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나중에 관직에 나아가기 전 보름 동안 가야산을 돌면서 치세의 지혜를 얻고자 했는데 그가 창녕현감으로 나가기 전에 쓴 `유가야산록`이 바로 그것이다.
한강은 38세때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되돌아와 멀리 가야산 자락이 보이는 대가천 옆에 회연초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627년(인조5년) 지방사림의 여론에 따라 회연서원으로 승격됐다.
한강은 초당 앞에 1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겨울에도 지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길을 본다`는 뜻의 누각인 `견도루(見道樓)` 앞에는 해마다 하얀 매화가 피고 있다. 그 당시의 심경을 정구 선생은 아래 시 한 수에 담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매화와 함께 사는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한 내용이다.
小 小 山 前 小 小 家(소 소 산 전 소 소 가)
자그마한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었네
滿 園 梅 鞠 遂 年 加(만 원 매 국 수 년 가)
뜰에 심은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나고
更 敎 雲 水 粧 如 畵(갱 교 운 수 장 여 화)
구름과 시냇물이 그림처럼 둘렀으니
擧 世 生 涯 我 最 奢(거 세 생 애 아 최 사)
이 세상에 나의 삶이 사치하기 그지없네
학문에 관해 왕성한 활동을 했던 한강 선생이지만 현재는 아쉽게도 그의 학문과 사상의 전모를 살피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때 해인사로 옮겨져 무사했던 그의 저술들이 1614년에 모두 불타고 일부만이 재집필돼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의 정신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회연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회연서원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서원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돼 있다. 숙종보감에 `중국 사신이 와서 동방심학의 종이 누구냐? 고 묻거든 정한강의 심경발휘가 동방심학의 종이라 답하자고 조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기록은 선생의 학행에 대한 시대의 존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회연서원의 지경재, 명의재, 양현청 등 건물의 현판은 한석봉의 서체로 유명하며, 역학을 새긴 각판이 서원에 보관돼 있다.
한강을 제향하는 서원은 전국에 걸쳐 두루 분포해 있다. 영남지역만 하더라도 회연서원을 비롯해 대구 연경서원, 성주 천곡서원, 창녕 관산서원, 창원 회원서원, 칠곡 사양서원, 현풍 도동서원, 함안 도림서원 등 모두 8개 서원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중에서도 회연서원은 한강을 제향하는 여러 서원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위상도 단연 으뜸이다. 성주8경중 제3경인 회연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회연서원의 최열곤 원장은 "삶의 절대가치인 윤리도의를 가꿔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우리 모두 앞장서서 행복한 사회 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당부하며 "원래 서원의 주요기능이 선현에 대한 경모 제향뿐 아니라 후학교육의 양대 기능이 있음을 되새겨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청소년 인성교육에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활성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9년 7월에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경남 창녕군 관산서원의 사당터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매장됐던 한강 정구의 위패를 발견해 공개했다.
창녕군 관계자는 "한강 선생은 놓치기 쉬운 창녕 관련 인물"이라며 "창녕 관산서원 터에서 발견된 매주시설과 형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첫 사례로써 역사적 의미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국내 처음으로 서원에서 발견된 매주(埋主)시설은, 철폐시킨 사당터 자리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속에 신주, 곧 정구의 위패를 봉안하고는 둘레에 사당에 얹은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겹겹이 둘러싼 기와 사이에는 습기제거나 벽사용으로 보이는 숯덩이가 포함돼 있다. 옹기 속에는 옻칠이 된 목제 위패 1점이 비디오 내시경을 통해 확인됐다.
관산서원은 1580년 한강 정구가 경남 창녕현감으로 부임해 마을마다 팔락정·부용정·술정 등 정자를 세우고 서당으로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신뢰와 존경을 받자 그의 사후인 1620년(광해군12)에 지방유림의 뜻으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관산서원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1868년과 1871년 서원 1700여 곳 중 47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고 위패를 땅에 묻을 것을 명했고, 이에 따라 관산서원도 1871년 철폐됐다.
현재 보존돼 있지는 않지만 당시 창녕의 역사·문화·풍물을 기록한 읍지 `창산지`를 펴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읍지 편찬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이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이 선생의 사후에 지방사림의 뜻에 따라 서원으로 승격되는데 여기에는 한강의 수제자였던 죽헌 최항경(崔恒慶 1560~1638) 선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죽헌은 학행이 뛰어나 동문들로부터 수하장(水下丈)이라 불렸으며, 회연서원 건립 후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의 두 아들인 최은, 최린 역시 한강의 제자로 수학했으며 세 부자를 일컬어 수하삼현(水下三賢)으로 불렀다고 한다. `수하(水下)`란 최항경의 오암정사가 정구의 회연서원보다 대가천 하류 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회연서원은 1690년 숙종 때 사액서원으로 칙령이 내려졌으며, 1871년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회연서원 또한 훼철됐다. 이후 1974년 6월부터 국고 보조 및 후손들의 출자로 서원에 대한 보수공사가 시작됐다. 1981년에는 후손들이 서원의 복원을 발의했고, 1984년 5월에 다시 위판을 봉안하고 복원했다.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8번지에 소재한 회연서원은 현재 경상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돼 있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