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조선 유학사의 큰 획 `영남 오현` 2회 신동으로 불리며 성장한 한강 3회 존경 받는 공직자의 삶을 살다 4회 귀향한 한강 정구와 회연서원 5회 한강학파의 등장과 확산 6회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리다  한강 정구는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성리학의 심오한 발전과 학파가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림간의 분열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붕당정치의 시대였다. 거듭된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기강과 윤리의식을 재건하고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학문이 바로 예학이다.  한강은 황폐화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하여 인정과 예의 확립에 주력한 대표적인 예학자로 손꼽히며, 예학을 체계화하는데 평생을 바침으로써 한국유교사상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1573년 가례집람보주를 시작으로 오복연혁도, 예기상례분류, 오선생예설분류, 심의제조법 등 많은 예서를 종합 편찬했다. 또 이황과 예학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들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을 간행해 퇴계 이황의 예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성리학자들에게 예(禮)는 학문적 과제였다. 예가 정치사회 속에서 이상적인 지표이기도 하고 현실적인 질서의 축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강은 퇴계 이후 뚜렷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안동권을 대신하여 영남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342명의 제자 가운데 약 90%가 영남출신이라는 점에서 한강학파는 강한 지역성을 띄고 있다.  경학, 산수, 음양오행, 풍수지리, 의약, 병진과 책략, 군사 지식 등에 두루 정통했던 한강은 당대의 명문장가로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명 문인으로는 초기의 제자인 문위, 장현광, 장흥효, 이윤우, 서사원 등으로부터 이천봉, 이천배, 최항경, 송원기, 손처눌, 후기의 제자인 허목, 황종해 등이 알려져 있다. 이중 장현광과 허목은 그의 제자들 중 특히 명성이 높았으며, 허목은 광해군 때의 혼란기에 관직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그의 문하에서 오래 수학하던 중 한강이 세상을 떠나자 문위와 장현광을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도 수학한다. 허목은 조선 후기 남인 성리학의 거두이자 실학파의 기원이 된다.  한강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과도 교류하였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허균의 집에 책이 많았던 관계로 한강은 허균의 집에 들러 책을 여러 권 빌려보곤 했다. 한강이 허균에게 역사책인 `사강`을 빌려보고 10년이 넘도록 돌려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에 허균은 정구에게 편지를 보내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주기는 더디다 했는데, 더디다는 말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라며 돌려주기를 독촉했다는 이야기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예학·역사·지리·의학·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했다.  동강 김우옹과 함께 양강으로 유명했던 이들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로 퇴계의 인(仁) 사상과 남명의 의(義) 사상을 계승하여 영남의 높은 학문적 정통을 세웠다. 한강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서 예학을 비롯해 동서고금의 학설을 널리 섭렵하였다는 점에서는 퇴계를 닮았으며, 동시에 이론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구체적인 현실 문제의 해결 즉 사업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는 남명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성주는 영남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과 남명학이 첫 만남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서 뜻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퇴계와 남명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평생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으며 서로 서신만 몇 번 왕래했다고 한다.  한강은 주자학에도 깊이 빠져 들었다. 주자(朱子)와 관련된 운곡·무이산·백록동·회암에서 마지막 자를 따 `곡산동암지`를 편찬하는가 하면, `무이구곡도`를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기도 하고, `무이지`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 특히 `무이구곡시` 10수는 그가 얼마나 주자를 그리워하며 주자학을 철저하게 실현하려 했는지를 알게 한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 위치한 운곡서원에는 한강이 그토록 존경한 주자와 한강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운곡서원은 1602년(선조35)에 한강이 충주목사로 부임하자 이곳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운곡서원으로 개편하고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61년(현종2)에 정구를 추가 배향했으며, 1676년(숙종2)에 `운곡`이라 사액되었다.  충북문화원 관계자는 "운곡서원은 규모는 작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멋이 우러나 조선시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며 "운곡서원 역시 대원    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894년에 복원되고 1963년에 중수됐다.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돼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강은 관직에 임명될 때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지방관의 외직을 자원했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백성을 교화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읍지 편찬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 창녕의 역사·문화·풍물을 기록한 `창산지`를 펴낸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만들어 동복지, 관동지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했다. 이는 후대의 읍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하나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풍속의 순화와 교육, 교화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이때부터 읍지 편찬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은 인격적 존중을 통한 교육을 지향해 한강교실은 늘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교육의 운영에 있어서 절차를 중요하게 여겼다. 입학에서부터 사제관계, 사회교육 등 모든 것을 예의와 절차에 입각해 운영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예사 유학자와 달리 실용성에 주목하였다. 경전을 교육내용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늘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학문을 통한 지식이 아니라 그 실천에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신을 스승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문하생들과 함께 철학하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이러한 교육방법을 볼 때 한강이 반복학습을 중시하고 개성교육, 능력별교육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겸양의 덕, 교육자로서의 사랑, 탁월한 교육방법은 오늘날 우리가 발굴해야 할 교육적 전통이기도 하다.  오건·퇴계·남명의 문하를 차례로 다니면서 학문을 닦은 한강은 거주지가 경상 좌·우도의 중앙인 성주에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퇴계·남명 양 학파를 융합하는 새로운 기점을 마련하게 된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종편집:2025-04-30 오후 04: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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