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 순서 1.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를 찾아서 2.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성주이씨 3.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벽진이씨 4.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성산성주배씨 5.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성산이씨 6.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성주도씨 7.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경산이씨 8. 성주에 뿌리내린 성씨-성산여씨 9. 또 하나의 성주 성씨, 가락김씨 성주군에는 현재 성주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성씨들이 집성촌 마을을 형성하는 등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행정구역상 지금의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모두 28성관(姓貫)에 달하며, 성주이씨, 벽진이씨, 성산성주배씨, 성산이씨, 성주도씨, 경산이씨, 성산여씨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제8회에서는 성주를 본관으로 둔 성씨 중 `성산여씨`에 대해 다뤄본다. 성산여씨의 기원 및 유래, 시조, 대표 인물 및 후손 등 각 문중 제반 사항 전반에 대해 심도 있게 파악해본다. 또한 경산재와 월회당 등 성산여씨 관련 유적을 방문해 성산여씨의 발자취에 대해 되돌아본다. 나아가 각 문중 및 지역민들에게 충효사상 및 주인정신 등을 함양시키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희종 때 한림원태학사를 지낸 여어매는 황소의 난을 피해 8학사 중 한사람으로 신라로 건너와, 신라 헌강왕때 성산군(현재 성주)에 세거하면서 전서의 벼슬을 지냈다. 여어매가 성산에서 대성을 이루게 한 여씨의 시조이며, 그 후예가 성산여씨와 함양여씨로 분관됐다. 전서공 이후 뒷 세대가 실전돼 고려말엽 삼중대광에 오른 여양유를 중시조로 하며, 고려 충렬왕 때 성주 야동리(현재 성주읍 백전리)에서 출생한 여양유는 고려 우왕 6년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군을 토벌할 때 성주에서 군량을 공급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운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뒤 조선 태조가 벼슬에 등용하고자 불렸으나, 학문에만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수결의 복호를 내렸다. 여양유는 절행이 고매하고 문장이 뛰어나 길재, 정몽주 등과 도의 교우했다. 여양유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고려 때 중량장을 지낸 여위충이고, 차자는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낸 여위현이다. 중량장공의 후예는 대구 가창파로 가창면 행정·냉천 일대에 세거하고 있으며, 판서공의 후예는 성주파이다. 판서공은 두 아들을 뒀는데, 차자 여극회는 문장이 뛰어나 조선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여위현의 부자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돈모재가 구미시에 위치해 있다. 여희림은 중종 2년에 생원시에 합격해 왕자 복성군의 사부를 지냈으며, 정암 조광조와 도의로 사귀었다. 중종 28년에 김안로가 경빈 박씨를 폐하고 복성군을 영일에 유배할 때 예전의 스승인 것으로 인해 기장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다시 기용돼 사헌부 지평에 제수됐다. 이후 원정 여희림은 천곡서원과 운양서원에 입향됐다. 특히 원정선생은 조선시대 때 권선징악과 상부상조 및 향촌을 교화·선도하기 위해 만든 자치 규약 `여씨향약`을 보급한 인물로, 정주학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이후 대사헌 정암 조광조가 여희림이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알렸는데, 이듬해인 중종 12년(1517) 전국에 여씨향약을 시행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여효증은 원정선생의 현손이며 좌승지 여찬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호조·예조·형조의 좌랑과 춘추관 기주관·성균관 전적·전라도사·고성 및 청주 등의 부사를 역임했다. 여중화는 지극한 효자로 현종 때 효자가 살고 있는 고을에 정려를 세워 표창하라는 나라의 명에 의해 향인이 표려했으나 공이 자겸불거했다. 여성거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찍이 사서삼경과 소학을 터득했고 정문에 조예가 깊었다. 3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후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성균관 전적·예조와 병조좌랑·충청도도사 등에 이어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여대로는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고매해 선조 16년(1582)에 진사에 오르고 이후 별과에 올랐다. 남명 조식에게 수업했으며, 동강·여헌·우복·미락재 등의 제현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솔했으며, 의성현령이 되고 사헌부 지평 등에 올랐다. 이후 현대에서는 여상원이 해방 후 동신섬유를 설립해 섬유수출에 앞장섰다. 또 대구일보를 창건하고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6선 및 대구은행 설립추진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성주읍 백전리에는 여양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경재당이 소재해 있다. 이 곳은 여양유가 살았던 곳으로,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한식날 향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월회당은 조선 중종 11년(1516)에 원정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여씨향약을 시행하기 위한 강회소로 창건한 건물이다. 특히 성산여씨는 현재까지 여씨향약 전통을 대대로 이어오고 있는 문중으로, 지난 2011년에는 서울시·예문관의 주최로 성산여씨의 역사문화체험을 선보였을 정도로 문중의 전통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월회당의 이름은 월일강회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으로,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모여 향약강회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곳은 국내 유일의 향약강회소이며, 지방문화재 48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월회당에는 양노소(경노당)를 설치해 여름철 복날과 설날 등에 노인들을 공양하는 풍습이 4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운양서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 학자였던 여희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벽진면 운정리에 위치해 있다. 원정은 처음 천곡서원 동별사인 향현사에 제향됐는데,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35년 운양서당으로 건립했으나 그후 중창해 운양서원으로 개편했다. 또 청도군 매전면 예전리에는 성산여씨 문중의 재실인 용운재가 위치하고 있으며,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에는 성산여씨 후손인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생가인 하회댁이 자리잡고 있다. 여현동 성산여씨 대종회장은 "문중에서는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현재 `경재당지` 책자를 제작 중에 있다. 약 90% 가량 진행된 상태며, 내년 봄에는 제작이 완료될 것"이라며 "현재 4~5만명의 종친들이 전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의 여씨들과도 연합을 이뤄 교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종편집:2025-04-30 오후 04: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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