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가야산신의 소원 2회 억울하게 죽은말 외 3회 태봉에 얽힌 이야기 4회 송계 권응인 선생에 얽힌 전설 5회 성주 문화 콘텐츠 사업의 현재와 미래  성주는 성산가야와 유교문화 역사를 간직한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특히 성주를 대표하는 인문들 중에는 문인들이 많다. 한강 정구 선생, 동강 김우웅 선생이 대표적이다. 이번 4회에서는 근세조선 중엽의 문사인 송계 권응인 선생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권응인 선생의 출신지인 성주군 선남면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소개해 전설이 단순히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인물과 해당 장소와 접목해 문화콘텐츠로 개발될 가능성을 파악해본다.【편집자주】   ■ 송계 권응인  권응인은 선남면 출신으로 문장이나 시에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조선중엽의 문사였으며 서재골에 살아 현재에도 그가 살던 자취가 남아있다.  권응인은 호를 송계(松溪)라 불렸으며 유명한 시를 많이 남겼지만 임진왜란으로 그 저서나 작품이 거의 불타버리고 `송계만록` 1권만 남았다.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퇴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중종, 명종, 선조 초년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재능이 탁월해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중동이었다. 보통사람은 한눈에 눈동자가 하나씩인데 한눈에 눈동자가 둘씩 있는 것을 중동이라 한다.  1542년 그의 형 응정을 따라 명나라 연경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의 문사들과 어울려 놀 때에 그들은 송계를 시험 삼아 시제를 냈는데 그는 그들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화답해 놀란 그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성주목사가 볼 일이 있어 송계가 살고 있는 마을 앞을 지나게 됐는데 어찌된 일인지 마을 앞에서 아무리 매로 쳐도 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목사는 송계를 찾지 않은 것을 깨닫고 선생을 방문해 환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한다.  또한 외국의 사신이 오면 왕의 특명으로 송계를 불러 사신을 접대하는 선위사가 돼 글로 문답하는 일을 주로 했으며, 특히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는 주로 송계의 손으로 된 것이 많았다.  퇴계가 별세해 장지를 향해 운구할 때의 이야기이다. 행상이 중도에서 쉬고 난 후 다시 운구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상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상여의 뒤를 따르던 퇴계의 제자들은 "이 부근에 송계선생이 오신 모양이니 곧 모셔와야겠다"며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송계를 찾게 했더니 과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송계가 오고 있었다. 급히 모시고 와서 글을 써서 상여에 붙이니 그제야 상여가 땅에서 떨어져 운상하게 됐다고 한다.  ■ 용바위의 피  선남면 동암동 동쪽 산 중턱에 용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생김새가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용바위 아랫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 부자는 큰 지주인지라 근처의 논밭을 모두 사들여서 이웃사람들에게 소작으로 줬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자의 논과 밭을 소작해 살지만 비교적 다른 마을사람들보다는 살림이 넉넉한 편이었다. 이웃마을에서는 이 마을을 부자마을이라고 불렀다.  고려말 즈음 비가 잘 오지 않아 성주에 큰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 되자 이 부자마을로 얻어 먹으로 오는 사람들과 구걸하러 오는 스님이 많았다. 풍년이 됐을 때와는 달리 이 부자마을사람들도 얻어먹는 사람과 동냥 오는 스님들 때문에 애를 먹었다. 마을사람들이 부잣집에 가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 거지들 등살에서 벗어나고 스님들에게 동냥을 안줄 수 있습니까?"  "그건 쉽지. 모조리 잡아다가 우리 창고에 가두게, 창고에 삼일만 가두어 두고 먹을 것을 안주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듣고 그 마을사람들은 거지와 스님을 모조리 부잣집 창고에 이삼일씩 가뒀더니 그 소문을 듣고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져 마을이 조용해졌다. 마을사람들은 과연 부자어른의 생각에 감탄을 했다. 그런 어느 날 나이 지긋해 보이는 스님이 또 동냥을 하려고 마을을 찾아왔다. 이 스님은 보기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덕이 높은 듯이 보였다.  "시주하십시오"라고 스님이 말하자 "시주라니, 올해처럼 흉년에 스님 줄 쌀이 어디 있어, 한번 동냥을 주면 또 많이 몰려올 터인데" 하면서 마을사람들은 스님을 부잣집 창고에 가뒀다.  삼일이 되던 날이었다. 창고의 문을 심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인이 문을 열어보니 스님이 "할 말이 있소, 주인장을 만나게 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하인이 "주인어른은 만나기 어렵소"라고 말했다. 스님은 다시 "주인에게 큰 덕이 될 일이니 만나게 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스님과 부자는 서로 만나 대화를 하게 됐다. 스님은 "좋은 덕이 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기 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힘이 다 돼 갑니다. 앞으로 3년만 지나면 이 마을이 저 바위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부자는 "그 바위 덕에 부자마을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 화를 막을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물으며 전과 달리 친절하게 대했다. 스님은 "용바위의 입부분에 석공을 데려다 그 곳을 찔러주면 이 마을이 옛날과 같이 풍년이 들고 잘 살아갈 것입니다. 저 바위는 원래 용이 하늘로 오르다가 못 올라가서 바위로 변한 것인데 이 마을을 쳐다보고 있기에 저 바위를 저렇게 두면 그 재앙이 마을로 돌아와 망하게 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에 부자는 석공을 불러다 용바위 입부분을 찌르라 했다. 그러자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일고 뇌성이 났다. 석공이 용바위의 혀를 힘껏 찌르니 순간 천둥이 치며 석공은 벼락에 맞아 죽고 용바위는 피를 흘리며 갈라졌다. 스님은 천둥소리와 함께 사라지면서 "부자의 행실이 괘씸해 하늘이 천벌을 내렸으니 이 마을은 3년내에 망할 것이다"고 사라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마을은 해마다 흉년이 들고 한집 두집 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용의 머리가 보이지 않은 서쪽으로 이사해 새로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성주문화원 관계자는 "성주군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성주인물지를 보면 성주출신의 자랑스러운 분들이 많이 있는데 군민들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분들의 업적을 군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성주출신 대표 인물을 재미있는 전설과 접목해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개발한다면 이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후손들에게까지 의미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취재 2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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