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성주읍 마을지명 이야기 □ 2회 선남면 마을지명 이야기 □ 3회 용암면 마을지명 이야기 ■ 4회 수륜면 마을지명 이야기 □ 5회 가천면 마을지명 이야기 □ 6회 금수면 마을지명 이야기 □ 7회 대가면 마을지명 이야기 □ 8회 벽진면 마을지명 이야기 □ 9회 초전면 마을지명 이야기 □ 10회 월항면 마을지명 이야기 성주군과 같은 인구 4만명 이하의 소도시일수록 자연부락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연부락이란 취락으로서 한 무리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기초단위가 되는 촌락을 뜻한다. 예를 들면 용산1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조지미라 부르고, 성산5리는 몰라도 새뜸이라고 하면 잘 알아듣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렇듯 씨족공동체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부락명이 상용되고 있지만, 막상 주민들은 지명에 대한 의미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거나, 구전으로 이어져 고착화되면서 부정확한 지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기원 및 유래, 지역적 특징 및 제반 사항 등 자연부락명을 중심으로 한 취재를 통해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아울러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수륜면은 성주군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회연서원, 법수사지삼층석탑, 법수사지당간지주, 심원사지폐탑, 보월동삼층석탑, 마애여래입상 등 소중한 문화재가 집중돼 있는 문화관광 성주의 블루오션이다. 면적은 군내에서 가장 넓은 87.92㎢, 가구수는 1천716가구, 인구는 3천200명이다. 행정구역은 백운리, 신파리, 수륜리, 성리, 적송리, 오천리, 봉양리, 신정리, 남은리, 수성리, 계정리, 보월리, 송계리, 작은리 등 법정 14개리로 나뉘며, 6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학발·학족(백운1리) 지형이 학의 발과 같이 생겼다고 해 `학발` 혹은 `학족`이라고 부르며 임진왜란 때인 1608년경에 전주인 이고성이 합천군 야로면 덕암리에서 이주해 마을을 처음으로 형성했다. 이철우, 남계 이양중이 세거했다. 지금은 이촌 현상으로 인해 약 30여명이 살고 있으며,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백운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백운이라는 마을 이름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백운산의 뒤로는 가야산이 둘러있고 앞으로는 산이 겹겹이 싸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안개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끼는데, 안개가 마을 아래로 낄 때 동네 전체가 신선이 타고 다니는 구름과 같다고 해 백운이라 불렀다고 한다"고 말했다. ▣우수동·새터 가야산 용지골에서 발원한 소가천의 계곡 고령군의 경계 상비리 계곡 못 미처 남향한 마을이다. 약 140년 전에 생긴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 `새터`라 불렸다. 뒷산이 소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해 지금은 `우수동`이라고 불리고 있다. 샘을 파면 마을에 액운이 생긴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 한 군데도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신당·신파·만지(신파1리) 수륜면 소재지의 마을이며, 서편 안쪽 고래의 취락지역을 `신당`이라 하고 도로변을 `만지`라 한다. 신당 마을은 고려말에 성주인 이장경의 아들 이백연의 증손 도은 이숭인(1349~1392)이 세거한 곳이다. 이숭인은 고려 공민왕때 등과해 예문관시학 등의 오랜 관직을 거치며 고려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 풍토에서 성리학을 토착화한 인물이다. 조선 선조때 전주이씨가 이곳에 입향했으며, 연당지가 있는 곳이라고 해 `신당`이라고 칭했다. 1936년 병자년 대홍수로 인해 수륜동에 위치한 면소재지가 이곳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전주인 이승과 그의 아들 심원당 이육 등의 문명과 충효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적송리(적송1리) 고려시대에 장대왕이 해인사의 주락전을 짓고 동쪽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때 적송(赤松)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을의 이름을 `적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중국 사기의 선인인 적송자와 같은 인물이 많이 산다고 해 적송이 되었다고도 한다. 적송리 마을 뒤쪽의 계곡 마을은 `땅개울`이라고 한다. 적송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1776년경 이 동네 앞으로 해인사로 가는 길이 생겼는데 인가가 없고 깊은 산골이라서 쉬어 갈만한 곳이 없어 불편했는데 해인사를 자주 드나들던 김씨라는 사람이 주막을 차리면서 하나 둘 인가가 생겨나게 돼 `새주막`이라고 이름 붙여진 마을도 있다"고 설명했다. ▣새묵·새목·봉항(봉양1리) 명사 배덕구의 세거지인 새목 마을은 조선 중엽 무렵 진주인 강문환이 입향해서 후손이 살고 있다. 당시 이곳에 들러 큰 바위에서 잠시 낮잠을 자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큰 새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뒷산의 생김새가 새의 목과 같아서 `새목`이라 하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상선불(봉양2리) 조선 정조때 성주도씨가 이 마을에 입향했다. 당초 이름은 `번계`라고 했다. 성주도씨와 선불사와의 갈등이 생겨 선불사의 큰 절인 용기사 주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게 됐다. 이에 용기사 주지가 마을 앞 큰 바위를 깨면 마을이 번창하고 자손이 잘될 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말을 따라 그 바위를 깨뜨리니 바위에서 피가 나고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고 한다. 그 후 도씨문중과 선불사는 망했다고 한다. 현재는 여러 성을 받아들여 15호를 이루고 있다. 번계 마을이 망한 후에 지명을 `상선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루미기(수성1리) 마을 북쪽 산의 생김새가 노루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 마을 이름을 `노루미기`라고 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면 노루가 빠진다고 해 우물을 파지 않고 있다. ▣황새봉·학봉·관봉(송계1리) 조선 영조때 조성된 마을로 앞산의 모양이 황새가 고동을 잡아먹는 형상이라고 해서 `황새봉` 또는 `관봉`이라고 불렀다. 마을의 노목인 향나무 밑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현재 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취재1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5-06-13 오후 05: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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