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성주읍 마을지명 이야기 □ 2회 선남면 마을지명 이야기 □ 3회 용암면 마을지명 이야기 □ 4회 수륜면 마을지명 이야기 ■ 5회 가천면 마을지명 이야기 □ 6회 금수면 마을지명 이야기 □ 7회 대가면 마을지명 이야기 □ 8회 벽진면 마을지명 이야기 □ 9회 초전면 마을지명 이야기 □ 10회 월항면 마을지명 이야기 성주군과 같은 인구 4만명 이하의 소도시일수록 자연부락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연부락이란 취락으로서 한 무리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기초단위가 되는 촌락을 뜻한다. 예를 들면 용산1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조지미라 부르고, 성산5리는 몰라도 새뜸이라고 하면 잘 알아듣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렇듯 씨족공동체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부락명이 상용되고 있지만, 막상 주민들은 지명에 대한 의미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거나, 구전으로 이어져 고착화되면서 부정확한 지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기원 및 유래, 지역적 특징 및 제반 사항 등 자연부락명을 중심으로 한 취재를 통해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아울러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가야산 기슭에 자리하며 성주군의 서부에 위치한 가천면은 포천계곡의 맑은 물과 산과 계곡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영남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독용산성 등 유서 깊은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가천면은 3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면적은 64.23㎢, 가구수는 1천54가구, 인구는 2천70명이다. 가천면은 법전리, 창천리, 신계리, 화죽리, 용사리, 동원리, 금봉리, 마수리, 중산리 등 법정 9개리, 행정 14개리와 3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면 소재지는 창천리이다. 가천면 관계자는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큰 우물이 있어서 이물방 또는 나물방이라고 불렀다"며 "문화유적으로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독용산성, 최규동 신도비, 금봉리 성지 등이 보존돼 있다"고 설명했다. ▣천창·창천동(창천1리) 가천면소재지 마을로 예로부터 맑은 샘이 흐르고 들판이 기름지다고 해 `천평`이라 했으나 1715년 목사 윤헌주가 마을 안의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지어 `천야창`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천창`이라 고쳐 부르게 됐다. 창천1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일제때 왜인들이 천창의 발음이 전쟁을 뜻하는 일본어 `센소`와 같아 창천으로 고쳐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창천리`가 됐다"고 전했다. ▣웃대실(화죽1리) 대나무가 있는 곳(죽곡)의 위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덕혼이 처음 터를 닦은 사람으로 전해진다. 노루목(노루미기) 마을은 가야산의 일맥이 형제봉을 거쳐 다시 정동으로 뻗은 줄기가 낮아지면서 대가천에 이르러 멎어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이 가늘고 길다고 해서 노루목이라 불렀다. ▣가무리·갓무리(동원1리) 동원리의 으뜸이 되는 마을인데 지금의 동원동을 말한다. 예로부터 가뭄이 잘 든다고 해서 `갓무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초에는 `가무리`라고 했으나 점차 갓무리로 변했다고 한다. 동원동의 동쪽인 양지쪽에 있다고 해서 `양촌` 또는 `양지갈모리`라고도 불리며, 선조때 진주 덕산에서 입향해 살았던 경주인 김귀남의 후손이 살고 있다. 동원2리는 동원리의 음지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음촌` 또는 `음지갈모리`라고 불린다. ▣마수·만수동·곰시·웅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했으며 말머리와 비슷한 바위가 있고 또 말안장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마수`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곰시`는 마수 마을과 더불어 병을 치료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은거지로 이름을 알렸으며, 마을의 지형이 마치 곰이 물을 먹는 형상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가야산 기슭에 다니는 곰들이 맑은 물을 많이 먹었다는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금봉리 금봉동·구정동·구정 가천면소재지 서쪽의 신흥 마을로 하천 상류쪽으로 1㎞ 거리에 독용산을 등지고 남향해 있다. 임란때 아군의 임전태세가 완벽해 마치 독용산에 조정의 삼정육조가 있는 것처럼 이를 사수했다는데서 삼정육조를 합한 의미로 `구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마을 형성 당시 마을에 샘이 9개가 있어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마을이 하천을 따라 형성되고 버드나무가 무성해 금조가 많이 날아들었다고 해 `금봉` 또는 `금봉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금봉리 노인회관 관계자는 "금봉리에는 높이 955m의 독용산 정상에 독용산성이 있다"며 "이는 영남지방에 남아있는 산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보존상태도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급경사가 시작되는 능선을 따라 쌓은 성은 외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고 성내의 방어를 쉽게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로는 외적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돼 역사자료에서 관련 기록을 잘 찾아볼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용사리 올미·용암 마을 어귀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주옥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용암동`이라 하며, 속칭 `올미`라고도 부른다. 올미는 옛말의 `올미르`를 뜻하는데 이는 고대 민속신앙인 용왕신을 제사하는 신단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올`은 위쪽을 뜻해 위쪽의 미르(용)바위가 있다는 뜻이다.가구와 인구수는 9가구 17명이다. ▣법림·웃법림(법전1리) 조선 정조때 석주백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마을 위치가 법림동의 위쪽이어서 `상법림`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법림산은 지리를 다스리는 산신이 있어 명기가 맺혀있다고 하며 `법림사`란 고철 터가 있다. 법림이란 마을 이름은 법림사란 절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법림사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불태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전촌(법전2리) 조선 선조때 김명중과 신상복 두 사람이 터를 닦았다고 전해지며, 응달과 양달로 나뉜다. `아전`이란 명칭은 당시 산의 형상이 마치 나비가 나르는 모양과 같다는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법전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마을에 있는 장수폭포는 옛날에 장군이 말을 매어 놓고 부하들과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던 곳인데, 그때 장군이 앉았던 흔적과 말발굽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했다. ▣중산리 도장골·천석골 마을 뒤의 도산을 `도장골`이라 불렀는데 옛날에 적지 않은 가구가 이곳에 마을을 형성했고, 그들 농가가 다 부유해 한 농가에서 벼를 천석이나 농사했다고 `천석골`로 불리다가 이후에 산적의 침략을 받아 동네를 현재의 중산리로 옮겨온 후 `중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취재1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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