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성주읍 마을지명 이야기 □ 2회 선남면 마을지명 이야기 □ 3회 용암면 마을지명 이야기 □ 4회 수륜면 마을지명 이야기 □ 5회 가천면 마을지명 이야기 □ 6회 금수면 마을지명 이야기 □ 7회 대가면 마을지명 이야기 □ 8회 벽진면 마을지명 이야기 ■ 9회 초전면 마을지명 이야기 □ 10회 월항면 마을지명 이야기 성주군과 같은 인구 4만명 이하의 소도시일수록 자연부락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연부락이란 취락으로서 한 무리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기초단위가 되는 촌락을 뜻한다. 예를 들면 용산1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조지미라 부르고, 성산5리는 몰라도 새뜸이라고 하면 잘 알아듣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렇듯 씨족공동체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부락명이 상용되고 있지만, 막상 주민들은 지명에 대한 의미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거나, 구전으로 이어져 고착화되면서 부정확한 지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기원 및 유래, 지역적 특징 및 제반 사항 등 자연부락명을 중심으로 한 취재를 통해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아울러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초전면은 성주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함 면으로서 넓은 들과 푸른 초목이 울창하다고 해서 초전(草田)이라 불리고 있으며, 백세각 등 성주를 대표하는 항일독립운동의 유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이견간, 선비정신의 표상인 야계 송희규, 독립정신을 행동으로 표출한 송준필, 이정기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초전면은 대장리, 고산리, 월곡리, 칠선리, 용성리, 소성리, 문덕리, 용봉리, 자양리, 봉정리, 어산리, 동포리 등 법정 12개리, 행정 24개리와 40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가구수는 2천372가구, 면적 66.30㎢, 인구는 5천263명이며 면 소재지는 대장리이다. 초전면이장상록회 관계자는 "초전면은 금오산 줄기의 부상고개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이 남류하면서 비교적 넓은 평야가 분포한다"며 "참외를 비롯해 수박, 사과, 복숭아, 포도, 참깨 등 과수작물도 많이 재배하는 등 성주군내에서 가장 부촌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대마(대장1리) 1천700년경 서초관이 이 마을에 처음 입향해 `신풍`이라 했으며, 그후 최씨, 차씨, 문씨가 점차 이주해 `가양`이란 마을을 이뤄 두 개의 마을이 됐다. 1748년(영조24)에 현재 성주읍 학산리인 답계역 역부였던 김계백이 5~6년이나 기른 말로 현 김천시 남면인 부상역에 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던 중 신걸이 고개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다. 취중이던 김계백은 놀라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주인을 위해 호랑이와 싸웠다. 말은 호랑이와 싸운 후 약 20여리를 내려와 어떤 주막에 도착해서 죽었는데 김계백은 주막집 앞에 말을 묻어주고 비석을 세워 그 은혜를 기리며 그곳을 `대마점(大馬店)`이라 했다. 그후 신풍과 가양 지역을 합쳐 `대마(大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와룡(용성1리) 와룡 마을은 마을 서북쪽의 와룡산이 완만한 구릉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벽진면 가암리 택정, 남쪽으로는 성주읍 용산리를 경계로 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선 세조때 한양에서 서산의 류한경이 이주해 마을의 입지가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와룡`이라 했다고 전한다. 용의 뿔이라고 하는 바위기둥이 동네 앞 들녘 산자락에 있다. 용성1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용성2리 못안 마을 아래에 있는 뒷미못(후산지)은 규모가 2만3천㎡ 정도인데, 연꽃이 필 때는 장관을 이루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감나무골·회골(문덕2리) 감나무골은 초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군도를 따라 3㎞ 지점에 벽진면 가암리와 경계하고 마을 동쪽 앞산은 초전면 용성리 와룡 마을과 경계하고 있다. 당시 마을 주변에 회나무와 갈나무가 많아 `갈나무골`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감나무골`로 칭하고 있다. 조선 정조때 좌수였던 이상포가 입향했으며 현재 44가구 106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산정 고산정은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공동(양지뜸)` 마을과 `공서(음지뜸)` 마을로 나뉜다. 공서는 뒤에 높이 180m의 산봉우리가 있고 공동은 뒤편이 낮은 구릉지로 돼 있다. 1500년경 손씨 몇 세대가 마을에 입향해 마을에 사람이 없어 고독하다고 해서 고산(孤山)이라 했고, 야계 송희규가 1545년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윤원형 등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전북 고산에서 귀향을 살고 돌아와 타지에서 고독하게 지낸 시절을 잊기 위해 고(孤)를 고(高)로 바꿨다고 한다. 고산리 노인회 관계자는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야계 송희규【사진1 참조】가 우리 마을에 백세각을 짓고 학문에 힘썼으며 많은 문집을 남겼다"며 "백세각은 3.1운동 당시 송준필을 비롯한 문인들이 주도한 성주만세운동과 경북유림단 파리장서사건(1919)의 모의장소로 사용된 곳으로써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백세각은 지방문화재 제16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홈실(椧谷 명곡, 월곡1리) 벽진이씨의 집성촌으로 36세대 50여명이 살고 있다. 고려 충렬왕때 산화 이견간【사진2 참조】이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순제가 이견간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해 살고 있는 곳을 물었다. 이에 이견간이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림을 그려 보이니 순제가 보고 마을에 물이 적겠다고 걸수산의 물을 당겨오기 위해 명(椧, 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당긴다는 글자가 처음 만들어짐) 자를 지어 마을 이름을 명곡(椧谷)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소야(소성리) 마을 이름은 고대 유명인사가 산촌에 은거하며 중국 양나라 원재가 지은 시문에 소경(韶景)이라는 화사한 봄날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 데서 인용한 것으로 산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려 놓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이 달마산인데 옛날에 밤이 되면 선녀들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서 가야국 때부터 `소야`로 불려 왔다. ▣봉무(용봉2리, 사진) 1800년경 안동권씨 몇 세대가 자리를 잡고 마을을 조성했는데 뒷산의 형세가 마치 새가 춤을 추는 것 같다는 것에서 마을 이름을 `봉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갈개(동포1리) 1515년 해주오씨가 입주해 갈대밭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후 광산김씨와 파평윤씨가 이주해 이들이 함께 농지를 개발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으며 갈대가 많다고 해서 `노포동` 또는 `갈개`라고도 불렀다. 동포1리 노인회 관계자는 "우리마을에는 `노포재`가 있는데 조선 중종때 무과에 급제해 통정대부로 성주목사를 지낸 김시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 재사"라고 설명했다. ▣어은 지명의 유래는 마을 앞에 백천이 흐르고 마을 바로 옆에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에 물고기가 많이 놀고 있어 `어은`이라 불렀다고 한다. 벽진이씨 약 30호가 살고 있는 집성촌이며 마을 앞에는 옥수당과 이극송의 신도비가 있다. 취재1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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