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법산 마을의 유래 □ 2회 오암서원 창건과 중건의 경시록 ■ 3회 한강 정구 문하 입문 □ 4회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생애 □ 5회 죽헌의 문집 및 시문, 유묵 □ 6회 장남 최은과 차남 최린의 약전 □ 7회 법산세고 편찬 □ 8회 영천최씨 역사인물과 현대인물 성주군에는 월항면 한개마을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씨 집성촌 법산마을이 있다. 하지만 법산최씨 집성촌은 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고령군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월항 한개마을과는 달리 사료와 집중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강 정구의 제실인 회연서원은 성주의 문화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약 5km 떨어져 있는 오암서원은 법산최씨의 시조가 세운 서원으로 많은 인재들이 발굴됐으나 문화유적지로는 소외돼 있어 최씨 후손들에 의해 문집 등이 발행되는 정도이다. 이에 법산마을과 오암서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죽헌 최항경의 생애와 사상을 심층취재함으로써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죽헌 최항경(1560~1638)은 경기 고양시 원당리 출생이나 16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성묘차 법산을 찾았다가 갑자기 작고하자 작천전사(남은2리)에서 삼년시묘를 마쳤다. 죽헌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의 어머니와 한강의 뜻이 맞아 학문이 고명한 한강 정구의 문하생이 되었다. 광해12년(1620) 죽헌이 61세때 한강이 작고하자 두 아들과 함께 친상(親喪)같이 하고 3년 동안 상주 노릇을 했다. 광해14년(1622) 63세때 등암 배상룡의 도움을 받아 모든 일을 죽헌이 주관해 6년에 걸쳐 회연서원을 완성하고 위판봉안 할 때 1천여 유림이 모인 가운데 죽헌이 초대 원장으로 추대됐다. 죽헌은 한강 선생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로 20세에 일찍이 공부에 매진했다. 인의예지로 성품이 바르고 대인의 풍모가 있어 수하장로(법산 마을이 회연서원보다 아래쪽이라 수하(水下)라 함)로 칭송됐다. 유림들이 모여 논의할 때마다 사리에 따라 선도하고 판단하며 봄바람 같은 기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뛰어난 덕을 갖춘 대인이라 앞다투어 기렸다. 권세와 이익, 번성과 화려함을 가까이하지 않는 검소하고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몸소 전원을 가꾸며 수양해 책과 글쓰기, 벗과 사귐에 정성을 다했다. 천곡서원과 회연서원의 원장으로 가르침과 깨우침의 전범이 돼 겸손이 가문에 미치어 두 아들(관봉 은, 매와 린)이 또한 뛰어나서 소씨일가(소순, 삼부자를 일컬음)에 비유되며 사림이 뜻을 모아 죽헌 삼부자를 오암서원에 위판봉안하게 됐다. 법산 마을은 유교 가문의 맥을 이어 13대를 내려오면서 자손이 번성해 문무과 22인, 생진 19인, 유학자와 효행자가 많이 배출됐다. 현세에도 각 분야에 기라성처럼 활약하고 있으며 전통을 지키는 유가의 후예로 선조가 남긴 고귀한 사상과 업적을 숭모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륜도의가 퇴색하고 있는 요즘, 조상의 학덕을 숭모하고 숭조사상에 뜻을 같이한 종인들이 1999년 11월에 결성한 오암학계는 죽헌 선조께서 법산에 입향한 유래와 선생의 언행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략한 요람을 펴내기에 이르렀다.(2007년 5월 발행 법산요람 인용) 영천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 일문이 성주의 법산 마을에 세거하면서 영남 일대에 법산최씨로 널리 알려지고, 전형적 유교 가문을 이루게 된 것은 죽헌 선생 3부자 대에 이르러서다. 영천최씨 한 집안이 죽헌의 윗대에 이미 성주에 살아온 바 있으나 중간에 서울로 옮겨 살았고, 서울로부터 다시 성주로 돌아와 법산마을에 정착한 것이 죽헌이다. □한강학단 형성의 주요 구성원이 된 죽헌 정구 두 분 큰 스승이 있어, 세칭 양강을 중심으로 각각의 유가학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죽헌은 소년시절 회연으로 가서 한강학단 형성의 주요 맴버가 됐으며, 후일 `강문 향오현`의 한 사람으로 칭송됐다. 한강의 거처인 백매원의 여러 제자 가운데 죽헌의 학덕과 행실을 높이 평가하고, 나이를 존중해 한강과 동문들은 그를 진작부터 `수하장(水下丈)`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죽헌의 두 아들인 관봉·매와 또한 백매원에서 수학하게 돼 이 삼부자를 `수하삼현(水下三賢)`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응와 이원조는 죽헌선생문집 서문에서 "선생의 도는 사상에서 얻어서 그 용모와 기상이 묻지 않고도 문정공의 제자임을 알 수 있도다"라고 했다. 또 송나라 때 채원정이 주자의 매부가 돼 주자에게 수학하니, 주자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보아 "이 사람은 나의 늘그막의 벗이다. 제자의 열에다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자리를 마주해 강론했다. 이때 서산의 두 아들도 주자에게 수학했는데, 여기서는 죽헌이 관봉·매와 두 아들과 함께 한강 문하에서 수학한 것을 비유해 높이고 기린 말이다.(김시업 교수의 학문과 사상에서 인용) 죽헌이 천곡서원 원장 재임 시 여러 차례 사양해 교체되고자 간청했으나, 한강이 편지를 보내 "원장은 교수의 책임이 있으니, 막중한 책임을 어찌 저버릴 수 있으리오.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 일을 맡지 못한다면 우리 도가 날로 외로워질 것이로다"라고 했다. 한강은 원래 서울지역에 살았으나 한강의 조부가 한훤당 김굉필의 사위가 되면서 경제 기반인 영남으로 낙향했다가 한강의 부친이 성산(성주)이씨 처가로 이거하면서 성주 사람이 됐다. 그래서 한강은 `宰相家爲處士家`라 하며 자신의 처지를 읊기도 하고, `회연야인(벼슬보다는 초야에서 장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취재3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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