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성주읍 마을지명 이야기 □ 2회 선남면 마을지명 이야기 □ 3회 용암면 마을지명 이야기 □ 4회 수륜면 마을지명 이야기 □ 5회 가천면 마을지명 이야기 □ 6회 금수면 마을지명 이야기 □ 7회 대가면 마을지명 이야기 □ 8회 벽진면 마을지명 이야기 □ 9회 초전면 마을지명 이야기 ■ 10회 월항면 마을지명 이야기 성주군과 같은 인구 4만명 이하의 소도시일수록 자연부락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연부락이란 취락으로서 한 무리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기초단위가 되는 촌락을 뜻한다. 예를 들면 용산1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조지미라 부르고, 성산5리는 몰라도 새뜸이라고 하면 잘 알아듣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렇듯 씨족공동체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부락명이 상용되고 있지만, 막상 주민들은 지명에 대한 의미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거나, 구전으로 이어져 고착화되면서 부정확한 지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기원 및 유래, 지역적 특징 및 제반 사항 등 자연부락명을 중심으로 한 취재를 통해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아울러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월항면은 한개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 세종대왕자태실(국가사적444호), 선석사(보물 제1608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와 여러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용각리·수죽리 고분군 등 비지정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월항면은 대산리, 용각리, 유월리, 보암리, 안포리, 장산리, 수죽리, 인촌리, 지방리 등 법정 9개리, 30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면적은 41.27㎢, 가구수는 1천722가구, 인구는 3천528명이다. ▣한개(대산1리) 한개마을은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1450년경 성산이씨로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영취산 자락에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오며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한개`란 동네 이름은 백천과 이천이 합류하는 큰 시내가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서 `한개`라 불렀다고 한다. 동네 앞에는 큰 나루터가 있었으며, 동네 뒤에는 신라 애장왕때 창건한 감응사가 있는데 옥류정이란 샘 때문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애장왕의 왕자가 눈병을 앓았는데 옥류정의 물로 눈병을 고치게 돼 고마움의 뜻으로 절을 지워줬다고 한다. 한개마을 노인회관 관계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개마을은 이천과 백천이 합류한 큰 내가 흐르며, 마을은 좌청룡 우백호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위치한 길지로 알려져 있다"며 "17세기 이후 과거 합격자가 많이 나왔으며 충절과 지조, 높은 학문, 독립운동 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너은골·어은골(대산3리) 임란때 성주 관부가 임시로 이곳 골짜기 인근의 성지봉까지 후퇴하게 됐는데 관부를 따라 몰려온 피난민 속에 도적이 많아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게 돼 동네의 터가 나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한강 정구가 퇴계의 동문인 최천강에게 "자네 같이 덕이 있고 너그러운 사람이 와서 살게 되면 동네에 불상가가 없어지고 조용할 것이며 또한 우리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학문이나 논하자"며 경주에서 옮겨와 살 것을 권하면서 현재의 동네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또한 너그러운 사람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관동`이라는 마을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통상적으로 `너은골(어은골)`로 불리고 있다. ▣먹뫼·큰마(용각1리) `먹뫼`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 성종때 도응천이 이 마을에 입주해 인근 마을인 저암, 필산, 당소와 함께 문방사우의 `먹`에 해당된다고 해 `묵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크다고 해서 `큰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월항면 관계자는 "용각리는 문방사우인 지·필·연·묵이 각각 지명에 들어가 있는 경우다 많다"며 "용각1리가 `먹`에 해당하는 `묵산`이라면, 용각2리는 마을에 대나무가 많았던 것에서 유래해 `붓`에 해당하는 필산의 붓대에 따라 `죽관`이라 불렀고, 용각3리는 `벼루`에 해당하는 `당소`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달암(유월1리) 경주인 월화 최천강이 마을을 개척해 그 후손이 살고 있고 해주오씨와 성산인 이문호의 후손이 살고 있다. 개척 당시 마을 뒷산에 달 모양의 바위가 많다고 해서 `월암`이라 했다고도 하며, 이 바위 위로 달이 떠오른다고 해 달이 뜨는 바위라는 뜻으로 `달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덤개·백인당(안포1리) 백인 혹은 백인당이라 칭하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600년경 임란을 피하기 위해 성주에서 이 마을로 피신해 100일간 어려움을 참고 견디었다고 해서 `백인(百忍)`이라 했다. 다른 하나는 이주와 이륜 두 선비가 이곳에 경산이씨 대종재사를 건립하고 참으면 덕이 되고 어질게 된다는 종족화목의 뜻을 담고 `백인당`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작촌·까치마·작곡촌(인촌1리) 고려말 나옹대사가 도망가는 충신 노씨를 데리고 선석사로 가던 중 까치가 많이 울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까치가 우는 곳은 손님을 부르는 곳이라 해서 노씨에게 그곳에 살도록 해 마을을 이루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까치마` 또는 `작곡촌`으로 부르다가 마을이 서편으로 옮겨지면서 `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부리티·부인·불인동(인촌2리) 지명의 유래는 옛날 합천 해인사의 법당에 불이 났을 때 이곳까지 불티가 날아왔다고 해서 `불티·부리티`라 했으며, 언덕 너머 선석사가 있다고 해서 `불인동`이라고도 했다. 또 선석사의 스님이 환속해 `불이퇴`로 불러오다가 `불이티`로 됐다는 설도 있다. 인촌2리 노인회 관계자는 "우리 마을은 선석사와 세종대왕자태실이 위치해 있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라며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로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대왕의 18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가 안장돼 있다"고 설명했다. ▣풀모산·풀무산·부를모산(수죽1리) 마을 앞산이 어머니의 유방과 같다 해서 `쌍유혈`이라 했다가 어머니를 부르는 산이라 해 `부를모산`이라 하다가 다시 `불모산`이 변해서 `풀모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 참조】 ▣철산(장산1리) 1250년경 이 마을이 형성됐으며, 당시 마을 앞 개천을 건너기 위해 철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철산(鐵山)으로 부르다가 그후 밝을 철(哲)자를 사용해 `철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산리 노인회관 관계자는 "마을에 옹기를 굽던 곳이 있었는데 이 부근을 `옹구동막`, 마을 중앙에서 동쪽을 `앞뜸`, 서쪽을 `뒤뜸`, 새로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을 `새뜸` 등으로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산·못안(지방리) 옛날 극지라는 천연적인 유지가 있었는데 이 유지의 이무기가 용이 돼 하늘로 올라가며 꼬리로 못둑을 무너뜨려 못의 물이 빠져 나가고 이 못터 안에 마을이 들어섰다고 해서 `못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취재1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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