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법산 마을의 유래
□ 2회 오암서원 창건과 중건의 경시록
□ 3회 한강 정구 문하 입문
■ 4회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생애
□ 5회 죽헌의 문집 및 시문, 유묵
□ 6회 장남 최은과 차남 최린의 약전
□ 7회 법산세고 편찬
□ 8회 영천최씨 역사인물과 현대인물
성주군에는 월항면 한개마을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씨 집성촌 법산마을이 있다. 하지만 법산최씨 집성촌은 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고령군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월항 한개마을과는 달리 사료와 집중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강 정구의 제실인 회연서원은 성주의 문화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약 5km 떨어져 있는 오암서원은 법산최씨의 시조가 세운 서원으로 많은 인재들이 발굴됐으나 문화유적지로는 소외돼 있어 최씨 후손들에 의해 문집 등이 발행되는 정도이다.
이에 법산마을과 오암서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죽헌 최항경의 생애와 사상을 심층취재함으로써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죽헌 최항경 선생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왕릉골)에서 진사 정(淨)과 완산이씨 사이에서 명종15년(1560) 3월 24일 출생했다.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덕구, 호는 죽헌 또는 성촌이다.
윗대로 4대(고조부터 선친까지)에 이어서 백여년간 서울지역에서 살았으나 그 이전대(9대조부터 5대조까지)에 성주에서 살았다. 죽헌의 선계는 고려조에 공이 있는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 연산부원군 휘(諱) 한(漢) 공을 시조로 죽헌의 16대조이다. 연산에 식읍을 받아 정착했는데 연산이 지금의 영천이어서 영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죽헌은 440여년 전에 성주 법산에 입향해 이름난 도덕군자의 문벌로 떨치게 됐는데, 죽헌이 세상을 떠난 후 90여년이 되어도 유림에서 명성이 자자해 영조6년 작천전사 터에 운암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다.
▶오암서원의 복원으로 도의문화 요람으로 발전
그후 고종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철폐된 지 136년 만에 종인과 유림의 염원으로 오암서원을 복원해 도의문화의 요람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다.
오암서원은 죽헌 최항경을 정위로 하고 그 아들 관봉과 매와 두 형제를 배위로 해 영천최씨 문중 불천위로 제사하는 곳이다.
2007년 영천최씨 법산문중 최열곤(前 서울시교육감) 대종회장 주선으로 `법산오암학계` 발족을 계기로 후손들의 선조에 대한 숭조정신이 더욱 높아졌다.
최열곤 대종회장은 "오암서원 `법산오암학계` 발족을 계기로 숭조돈목을 통해 아름다운 전통문화와 인륜도의를 숭상하고 사람다운 삶을 모든 종인이 함께 누리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죽헌 최항경은 한강 정구의 수제자로서 수하장으로 불리고 한강학단의 수많은 제자들 중 죽헌이 회연서원 초대 원장에 추대돼 회연서원의 건립과 한강문집 편찬 등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한 높은 학덕을 겸비한 선비다.
죽헌의 윗대를 보면, 15대조 완(玩)은 문과장원해 여러 관직을 거쳐 봉익대부 판도판서(종2품)에 증직됐다. 10대조 영(英)은 문하시중으로 제수 받았고, 장인 농서 이백년과 함께 옹서가 대를 이어 문하시중으로 유명하다.
10대 방조 무선은 고려말에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과 화포를 발명 제조하는 한편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전함을 건조해 진포대첩에서 왜구 500척을 격파하고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워 순성공신 문하찬성사가 됐다.
다시 중대광 영성군에 피봉 됐으며, 조선 태종이 검교참찬 문하부사를 제수했고, 태종은 대광숭록대부 의정부 겸 병조사를 추증하고 영성부원군에 추봉했다.
무선공의 아들 9대조 해산은 선친에 이어 화약, 화포, 전함을 연구하고, 군기시 부정 겸 우군절제사, 제주안무사, 병조참판, 동지중추원사 등을 지냈으며, 파저강 야인 정벌에 크게 공을 세운바 있다.
▶죽헌 선생의 학문과 사상 응와 이원조의 극찬을 받다
문하에 입문해 위기지학(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에 뜻을 세우고 수학했으며, 날로 학문이 진일보했다. 죽헌은 일찍이 자경잠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고 학문이나 덕행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죽헌은 자경잠에서 "하늘이 부여한 본성은 고르고 다 같이 착해 넉넉하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다. 요 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훌륭한 행동을 하면 그들과 같이 된다. 저 산의 나무를 보라. 경계해야 할 것은 소나 양을 방목해 자라는 싹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별안간 좁은 길에 띠풀이 자라서 길이 막힐까 두렵다. 이 마음을 붙잡아서 잠시의 시간도 놓아버리지 말라. 이 마음을 어떻게 붙잡아야 할 것인가. 깊게 탐구해 투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치에 의존하고 욕심을 막고 옳은 방법에 따라 공경하고 바르게 행하는 길이다. 성의, 바른 마음,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심과 지혜를 이루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힘쓰는 것이다. 안자(조선 후기의 학자)는 예를 어기지 말라는 방법으로 수양했고, 증자(중국의 철학자)는 자기 반성하는 방법으로 수양했다. 오직 내가 힘쓸 따름이다. 흙 한 삼태기라도 먼저 노력하면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학문에 매진했다.
응와 이원조는 죽헌문집 서문에 "퇴계 선생 이후로 덕업이 가장 왕성하기로는 우리 문목공 정구 선생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고을이 마침내 군자들에게 노나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중에서 죽헌 최항경이 가장 드러났으니, 가장 가까이 살면서 가장 먼저 한강 선생의 문하에 올랐으며 덕구(죽헌)는 학문의 도를 얻었다고 한강 선생은 찬탄 신임했다"라고 적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씀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인데, 죽헌 문집이 처음에는 임란 때 불타버리고 다시 병자호란 때 집안이 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산질되고 4권 2책의 잔여분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문집을 살펴본 이원조는 "죽헌의 도는 한강에게서 얻었다. 용모와 기상은 문정의 제자 같았고, 의론과 견해는 서로 어려운 것을 물어보았으나 채원정(남송 때 건양 사람으로 서산 선생이라 불렀다)·채연(남송 사람, 역(易)에 조예가 깊었다)·채침(채원정의 아들로서 구봉 선생이라 불렀다) 부자와 같았다"고 극찬했다.
취재3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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