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법산 마을의 유래 □ 2회 오암서원 창건과 중건의 경시록 □ 3회 한강 정구 문하 입문 □ 4회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생애 ■ 5회 죽헌의 문집 및 시문, 유묵 □ 6회 장남 최은과 차남 최린의 약전 □ 7회 법산세고 편찬 □ 8회 영천최씨 역사인물과 현대인물 성주군에는 월항면 한개마을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씨 집성촌 법산마을이 있다. 하지만 법산최씨 집성촌은 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고령군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월항 한개마을과는 달리 사료와 집중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강 정구의 제실인 회연서원은 성주의 문화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약 5km 떨어져 있는 오암서원은 법산최씨의 시조가 세운 서원으로 많은 인재들이 발굴됐으나 문화유적지로는 소외돼 있어 최씨 후손들에 의해 문집 등이 발행되는 정도이다. 이에 법산마을과 오암서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죽헌 최항경의 생애와 사상을 심층취재함으로써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관봉공, 천륜의 정이 진솔한 詩 두각 만년에 학문 치중, 선친 유지 받들어 죽헌의 장남 관봉공 최은의 자는 사행(士行)이며, 별호는 나광자(懶狂子)이다. 선조16년(1583)에 법산리에서 태어나 효종7년(1656)에 죽었으며 향년 74세였다. 안동 화음 권양 선생의 딸과 결혼했고, 부친을 따라 한강 문하에서 수학했다. 인조11년(1633) 사마시에 형제가 나란히 합격했으나 대장부의 사업이 반드시 여기에 있지 않다며 벼슬에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때 집안에서 형제가 함께 등과하는 경사스런 일이라서 주연을 베풀며 합격 축하연을 했는데, 관봉은 자기 서재에서 나와 보지도 않자, 죽헌이 이 말을 듣고 "은은 앞으로 정인군자가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자호 관봉과 별호 나광자의 일화도 재미있다. 법산의 동쪽 2~3리 거리에 수려한 산이 있고 그 골짜기에 맑은 샘물이 흐르는데 황새가 그 물을 날마다 먹는 것을 보고 심신이 상쾌해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심취하다가 이에 감응해 관봉이라 자호했다고 한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는 부친의 명에 따라 아우 린과 조카 진화를 데리고 고령창의소에 출진해 문경까지 북진했으나 남한산성이 이미 함락됐다는 비보에 분개해 통한의 분루시를 남겼으며 그로부터 `게으르다`라고 나광자라 별호했다. 만년에는 법산 아래 집을 짓고 조용히 경전을 몰입해 어진 마음씨와 생각, 품성을 기르고 닦았다. 관봉은 사리가 분명하고 바른 언론관으로 사림간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면 올바른 도리와 이치에 합당한 논의를 이끌었다. 또한 천곡, 회연 양쪽 서원에서 학문에 치중해 선친의 유지를 어김없이 받들었다. 관봉은 저술보다는 후학을 가르치는 육영사업에 열중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선비였다. 백매원 동문 가운데서 의로운 행실이 동료들보다 출중해 언제나 어른의 자리에 추대됐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는 병든 세상에서 출세를 지향하는 자들은 과거시험에 몰두했지만, 관봉은 시문에 빠져 온통 마음에 쏠렸음은 문헌의 내용이 입증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만 가지 말이라도 많다 할 수 없고, 한 가지 말이라도 적다 할 수 없다면, 시문의 귀함이란 특별히 공을 지칭하여 높일 따름이니 이것이 많고 적음으로 어찌 평가하겠나" 하였다. 이렇듯 생활로써 충분히 이해하고 그 뜻을 잊지 않을 폭넓은 시구 150여제 가운데 남이 지은 시운을 따서 지은 시와 선사하는 물건을 주고받는 시가 많고, 여러 수의 만시와 함께 넓은 교우관계와 두터운 신망을 드러내 주는 것이 많다. ▶매와공, 8세에 한강문하 취학 `영재` 형과 사마에 올랐으나 벼슬에 무심 매와공 린의 자는 사발, 별호는 치광자이며, 죽헌의 둘째 아들이다. 선조30년(1597) 정유년에 왜적의 재침으로 집안이 백운산성에 피난하고 있는 중에 출생해 인조22년(1644)에 49세로 별세했다. 선친이 돌아가신지 7년 뒤이고, 형 관봉공보다 12년 먼저 요절했다. 연안 죽재 이시익 선생의 딸과 결혼했는데, 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충목공 죽창 이시직 선생의 질서가 된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 글을 익히고 8세에 선친 죽헌을 따라 한강 선생에게 취학했다. 한강은 늘 죽헌의 두 아들이 영재로 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고 한다. 조정이 늘 시끄러워 과거에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11년(1633) 형인 관봉공과 함께 사마(司馬)에 올랐으나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작천에다 작은 집을 꾸미고 창밖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고 매와라 편액해 자호로 하고 시의 노래를 소리 높게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인조13년(1635)에는 `퇴계이선생변무소`를 써서 동학들을 놀라게 했다. 호란 때 형제가 함께 조카 월주공을 데리고 의군으로 나섰으나 문경에서 벌써 남한산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치광자라 별호했다. 훌륭한 문장력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전란으로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춘정편략, 상제예설, 가례의절, 대학인의, 독서휘록 등이며 특히 춘정편략서는 본문이 전하지 않아 그 진가를 가늠해볼 뿐이다. 특히 성주 출신의 순절의사 이사룡에 대한 기록과 제문은 모름지기 사대부란 애국적 지사여야 한다는 공의절의사상(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매와공은 선친의 가르침을 쫓아 스스로 제여재잠 책을 짓고 행해 제사 예절의 진실한 뜻을 계몽했다. 뒷날 오암서원이 창건되고 유림의 공통된 뜻을 좇아 선친을 주벽으로 해 관봉공과 형제가 나란히 배향됐다.(참고문헌 `법산요람`) 취재3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5-06-13 오후 05: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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