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에 은둔한 고운 최치원은 신라말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13세에 당나라에 유학가 18세에 빈공과에 합격한 그는 유학시인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개혁을 추진했으나 그의 개혁은 중앙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최치원은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다 마지막으로 가야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뒤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선이 됐다는 전설만 전해진다. 최치원은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입산하는 도중 한 노승이 산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절절한 심경을 담은 입산시를 남긴다. 스님은 말하기를 청산이 좋다지만 어이해 걸망지고 산 문밖에 나가느뇨 청산에 노닐다가 청산에 묻힐 넋이 청산 어느 곳에 흔적인들 있으리오 그는 가야산에 있으면서 친형인 현준대사와 정현화상과 더불어 벗하며 산문 외출을 일체 금하며 지냈다고 한다. 최치원은 지금의 홍류동 계곡에 있는 농산정에서 바둑을 두며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산에 있는 동안 무릉교에서부터 화선암에 이르기까지 절승 곳곳에 이름을 지었는데 그 명칭이 오늘날에 이른다. 해인사 아래 마을인 치인리도 고운의 이름인 치원에서 비롯됐다. 이 농산정은 후대 사람들이 고운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는데 정자의 이름은 고운의 시에서 따왔다.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려워라 세속의 시비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들러치게 했나 해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이 1천년 이상 된 학사대전나무가 있다. 높이가 약 30m, 둘레가 5.1m 정도 되는 이 고목은 나무줄기가 지상에서 10m 높이에서 두개로 벌어져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전나무는 고운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라고 전한다. 말년에 고운은 제자들 앞에서 학사대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란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대를 만나지 못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고운은 천년이 지나도록 그의 명성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문집인 계원필경을 남겼고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신라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생각과 사상은 최승로를 통해 고려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가야산을 찾는 시인묵객은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를 노래했다. 산의 드높은 기상을 받아 초연지기를 꿈꾸는 선비들의 시와는 달리 가야산을 노래한 시는 최치원에 대한 연모와 은둔하는 삶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고려말을 대표하는 유학자 목은 이색은 최치원을 그리며 시를 남겼다. 가야산은 천하의 절경을 자랑하고 천년의 세월 고운에 필적할 이 드물었네 내 그를 따르고자 하나 미치지 못하여 공연히 선생이 남긴 계원필경만 읽네 그대 고운의 자취 자세히 찾아보아 돌아와 때 묻은 내 가슴을 씻어주오 고운 선생이시여 천년의 학이시어 높은 누각에 기대어 그대를 떠나보내네 박삼태 시민기자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습니다.
최종편집:2025-04-30 오후 04: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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