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회 법산 마을의 유래 □ 2회 오암서원 창건과 중건의 경시록 □ 3회 한강 정구 문하 입문 □ 4회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생애 □ 5회 죽헌의 문집 및 시문, 유묵 □ 6회 장남 최은과 차남 최린의 약전 ■ 7회 법산세고 편찬 □ 8회 영천최씨 역사인물과 현대인물 성주군에는 월항면 한개마을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씨 집성촌 법산마을이 있다. 하지만 법산최씨 집성촌은 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고령군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월항 한개마을과는 달리 사료와 집중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강 정구의 제실인 회연서원은 성주의 문화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약 5km 떨어져 있는 오암서원은 법산최씨의 시조가 세운 서원으로 많은 인재들이 발굴됐으나 문화유적지로는 소외돼 있어 최씨 후손들에 의해 문집 등이 발행되는 정도이다. 이에 법산마을과 오암서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죽헌 최항경의 생애와 사상을 심층취재함으로써 문화성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군민들에게 뿌리의 중요성과 애향심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성주문화원이 성주역사인물을 현창하고자 2016년 9월 국역으로 죽헌과 그의 두 아들 관봉·매와 3부자의 문집과 자료들을 수집해 법산세고(상하권)를 발간했다. 2016년 10월 27일 성주군청 대강당에서는 법산 입향조 죽헌 최항경 선생과 그의 아들 관봉과 매와, 등암 배상용의 학문과 사상, 덕행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법산세고 발행 출판기념회를 겸하는 학술대회는 성주역사인물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성주문화원(원장 도일회)과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원장 정우락)이 주최하고 성주군과 성주군의회가 후원했다. 이날 행사에 지역내 각급 단체장과 유림단체 대표, 지역 원로, 출향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죽헌 삼부자의 위상을 잘 나타냈다. 경북대 이영호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학술대회에서 실학박물관 김시업 관장은 `죽헌 삼부자의 인간 자세와 한강학파에서의 위치`라는 주제로 학술발표를 했다. 죽헌 삼부자 문집이 처음 간행된 해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전란과 화재로 산실된 글을 모아 간행을 위해 편집을 마친 것이 1868년쯤으로 보인다. 응와 이원조에게 죽헌집·관봉집·매와집의 서문과 함께 매와의 행장을 받은 해가 1868년인 것으로 보아 이로써 편집이 완성되고 이어서 목판집 간행 사업에 착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첫 번째 복간사업이 1992년의 `법산세고` 상하 두 권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2년에 `국역 매와선생문집`이 간행됐다. 한문 문집의 국역이란 매우 어렵다. 문집 속에는 정감어린 사물의 크기나 범위를 줄여 간략한 표현인 시적인 기록이 많다. 이를 제대로 번역하는 일은 글을 짓는 것보다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현(죽헌 삼부자)의 후손들은 힘을 모아 집안사람으로 국역하고 출판하는 큰 역사를 이뤘다. 1992년 `법산세고` 영인출판 시에 발행인이 간행사에서 번역 출판을 함께 못한 점을 매우 아쉬워했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매와의 후손들이 이 일을 해냈던 것이다. 또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오늘, 이번에는 성주문화원이 성주인물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죽헌 삼부자의 문집을 국역해 법산세고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에 죽헌집을 중심으로 문집의 대강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법산 입향조 죽헌 선생 문집 최항경의 자는 덕구, 호가 죽헌이다. 고조부 희호가 서울 부근으로 이사해 한훤당과 동서가 되었고, 고령 현감을 지냈다. 증조부는 참봉, 조부는 사헌부장령, 선친 정(淨)은 성균진사이며, 비 완산이씨는 종실 연창군 이학수의 따님이다. 죽헌은 1560(명종15)년 경기 고양 원당리에서 출생해 1638(인조16)년 성주의 작천정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9세였다. 죽헌은 선조의 종생질로서 어릴 때 외가에 갔다가 그 집의 생활이 너무 호화로움을 보고, 이 집은 선비의 자식이 머무를 곳이 못된다고 돌아가기를 고집하니 모두들 뒷날 반드시 군자가 되어 가문을 빛낼 아이라고 평했다. 실제 죽헌은 성품이 온순하고 학문이 순수해 `숨은 군자(隱君子)`라는 평을 들었다. 한강 문하에서 위기지학(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을 닦아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한강이 예서를 저술할 때 두 형제의 학문이 원숙해져갈 무렵 죽헌 삼부자에게 예설 편찬의 소임을 맡겼으므로 무흘 산천암정사에 가서 저술 작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죽헌은 일찍이 천곡서원(벽진면 해평리)의 원장을 여러 해 맡은 뒤 사퇴코자 하니 한강이 "원장은 교수하는 막중한 책무인데 그대 같은 이가 맡지 않겠다면 우리 도(道)가 날로 외로워질 것"이라며 만류했다.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죽헌은 "이제 늙었으니 신하된 의리를 다하지 못하리로다"하고 두 아들을 명해 고령 의병소에 나가 싸우게 했다. 성호 이익은 퇴계-한강의 학맥을 미수 허목을 거쳐 근기학파로 계승한 실학의 종장이며, 대산 이상정은 퇴계-학봉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맥 위에서 1세기에 우뚝한 학자라고 해 이들 영남학파의 대표적 석학들의 서술은 죽헌의 학덕을 후세에 알리는데 결정적 근거가 되는 셈이다. "퇴도(퇴계 이황) 선생 이후에 덕업이 가장 성하기로는 우리 문목공(한강 정구) 같은 분이 없으니 우리 고을이 드디어 군자의 노(魯)나라가 되었고, 죽헌 선생 최공이 드러났으니 그 살던 곳이 가장 가깝고 사문에 오른 것이 가장 일찍이었고, 가르침을 받음이 가장 오래였다"라고 해 죽헌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했다. 덕(德)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이 있기 마련인데 애석하게도 임진왜란에 불타버리고 두 번째는 집의 화재로 흩어져버려서 상자 속에 끊어지고 타다 남은 미완전한 것이 있었으나 아직껏 인쇄를 못해, 고을의 인사들이 탄식해 말하기를 "선생님인데도 이제껏 문집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했다. 불천위는 유교문화의 산물로 `영원히 옮기지(없애지) 않고 기리는 신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조상이 별세했을 경우 후손들이 4대 봉제사를 끝낸 뒤에 죽은 조상을 대신하는 신주를 묻어 없애는 풍습이 있다. 그렇지만 학덕이나 공적 등이 뛰어나 그 삶이 후세인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인 경우에는 후손이나 후학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며 기리도록 하고 있는데, 죽헌 선생 삼부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취재3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최종편집:2025-04-30 오후 04: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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