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일주문에 가기 전 사찰의 배치와는 무관하게 세워져 있는 탑이 있다. 이 탑은 길상탑이다.
2단의 기 단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으로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탑에는 소탑 157개와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 4장도 함께 나왔으며, 탑지는 신라 말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탑지의 내용은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 56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석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당나라 19대왕 소종이 중흥을 이룰 때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서쪽에서 멈췄고 동쪽으로 옮겨와 굶어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했다.
해인사의 별대덕인 승훈이 이를 애통해 하더니 도사의 힘을 베풀어 미혹한 무리들의 마음을 이끌고, 각자 벼 한줌을 거두게 해 함께 옥돌로 삼층을 쌓았다.
해인사 길상탑지에는 길상탑에 대해 이렇게 기록돼있다.
때는 건녕 2년 7월 16일에 적는다. 대장은 승 난교이다. 건녕 2년 을묘년 7월의 운양대 길상탑기 석탑은 삼층으로 전체 높이가 1장 3척이다.
전체비용은 황금 3푼, 수은 11푼, 구리 5정, 철 260칭콰, 숫 80섬이다. 만든 비용이 모두 조120섬이다.
장사는 승 난교와 승 청유이고 부장사는 거불과 건상과 구조이다. 담당 유나는 승 성유와 승 인정과 비구 석이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200여m를 가면 조그만 암자가 나오는데, 이곳은 홍제암으로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법명이 유정 호가 사명당인 스님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다.
전란이 끝난 후 이곳에 머물던 스님이 열반에 들자 광해군은 `자통혼제존자`란 시호를 내렸고 암자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사명대사의 법제자 해구스님이 초암이었던 자리에 가람을 창건해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는데 이에 따라 암자 이름도 영자전이라 불렸다. 부도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해에 만들어졌고 비석은 광해군4년(1610)에 건립됐다.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의 일이다. 당시 합천 경찰서장 이었던 일본인 죽포와 형사들은 버포학원을 폐쇄한데 이어 사명당 비문이 조선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는데 귀감이 돼 황국 신민화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홍제암 동쪽에 있는 사명당 비석을 완전히 부수기로 결심했다.
특히 비문의 내용 중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는 가토 기요마사의 물음에 사명대사는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의 목이다"라고 한 부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천경찰서장은 휘하의 형사와 석수를 데리고 홍제암에 있는 사명당 비석을 무너뜨리고 비면을 4등분해 사이사이를 정으로 쪼아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보고 있던 산내 대중들은 그저 울분을 토할 뿐 어떻게 할 도리 없이 보고만 있었다.
사명비 파괴가 조선총독부에는 큰 공로로 인정돼 며칠 후에 죽포는 통영서장으로 승진했으며, 그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충렬사를 침범해 사당의 현판과 충무공 영정을 훼손하고 없애, 결국 천벌을 받아 10여일 후 전염병에 걸려 급사했다.
이후 홍제암 사명대사 탑비는 복원했지만 4등분으로 조각난 흔적이 십자모양으로 남아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참배차 해인사에 왔다가 이곳에 들러 구국성사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니 특별히 주변을 성역화하고 전체로 보수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에 따라 건물 전체를 완전 해체해 새롭게 건립했다고 한다.
박삼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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