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과 같이 5만명 이하의 소도시일수록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삶과 유대감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이에 본지는, 이웃 동네의 삶과 다양성을 보도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이타적인 의식 개선을 바탕으로 지역발전과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본다.【편집자 주】
▷성주읍 저자골(경산7리)
▷대가면 사도실(칠봉2리)
▷초전면 고산정(고산리)
▷선남면 오도마을(오도리)
▷금수면 오당(광산3리)
▶용암면 두리실(본리2리)
▷벽진면 중리마을(봉학2리)
▷수륜면 양정마을(신정리)
▷월항면 한개마을(대산1리)
▷전주 한옥마을
▷서울시 북촌 한옥마을
▷가천면 활미기·활목(금봉리)
두리실은 마을 앞 뒤에 신천과 야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면소재지에서 서쪽 성주로 통하는 지방도 905호선을 따라 약 3km 정도 거리 도로 북측에 위치해있다.
본리2리 두리실은 두릉방, 두릉면, 용두면, 용암면으로 소속 명칭이 바뀌었으며 마을 이름과 관련해 다양한 유래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두릉방의 중심마을이란 뜻인 본리(두리실)라 불린 설과 세조 때 안동인 권유검이 이곳에서 은거한 후 언덕에서 침입자를 막았다는 뜻에서 두릉이라 부른 것이 변형돼 두리곡·두리실이 됐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마을 안산이 명기(明氣)를 가득 담은 뒤웅박의 모습이라 뚜리실이 변형돼 두의곡(실)이 됐다는 설이 존재한다.
마을 동북편 골짜기 초입의 관동리도 현재 두리실에 포함돼있다. 두리실과 관동리는 본래 별개의 마을이었으나 두 곳 사이 집들이 많아지면서 지금은 포괄적으로 두리실이라 지칭한다.
두리실은 1456년 가산군수를 지낸 권유검의 후손인 안동권씨가 주요 성씨로 집성촌을 이뤘으며, 마을내엔 영야헌 권유검을 추모하는 재사인 영모재와 영야헌권공유허비, 두릉예찬팔경시비 등이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다.
영모재는 입향조 권유검의 학덕을 추모코자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로써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오랜 세월 풍랑으로 인해 1943년경 재건됐으며, 이후 1999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진행했다.
두릉예찬파경시비(사진)는 주민과 문도 등이 우강 권재수의 선비정신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94년에 세웠으며 우강유고에 실린 시가 한문과 한글번역문으로 새겨져있다.
김하기 두리실 마을이장은 "옛날 두리실은 과수를 많이 재배했으나 현재는 참외가 주 수입원으로 현재 45가구, 9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며 "배산임수 지형의 남향마을로써 5년 전만 하더라도 베짜기 등 전통기예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한 채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두리실 마을은 땅이 비옥하며 기후조건이 목화와 뽕나무 재배에 적합해 무명과 명주 등의 베짜기가 성행함에 따라 왕실용 진상 명주를 이 곳에서 짰다고 전해진다.
길쌈과 바느질을 여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전통시대엔 집집마다 베틀이 필수품이었고 특히 두리실에서 베짜기가 유명해지자 특출난 솜씨를 지닌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품질 좋은 무명베를 많이 만들었다.
안동권씨 집안은 여자에게 밭일을 절대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대대로 전승된 길쌈 등 전통기술을 익힐 수 있었으며, 이로써 오늘날 2명의 명장을 탄생시켰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명주짜기의 기능보유자 故조옥이(위의 사진) 선생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6호인 무명짜기 기능보유자 백문기(아래 사진, 94세)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두 분의 명장은 권씨 종가에 시집을 와 누에를 치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등 베짜기의 모든 기술을 익혔다.
안동권씨 집안 며느리들을 통해 대물림된 전통 베짜기 기술은 그 시대 생계 수단이자 인고의 결정체였다. 무명 제작은 가을날 목화에서 얻은 솜을 햇볕에 말리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등 오랜시간 정성을 쏟아야 한 필의 무명이 생산됐다.
무명은 우리나라의 전통직물로써 의복 외에도 이불이나 생활용구를 만드는 재료로 애용돼 화폐의 기능을 지니기도 했다.
이처럼 무명짜기는 한민족의 의복을 풍요롭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400여년이 넘는 역사가 반영된 여인들의 애환을 담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현대에 와서는 화려한 견직물과 대량 제직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마을에도 전통기예를 계승받을 후계자가 없는 실정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전통기법의 보호와 전승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전수교육조교를 시행하거나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관광객들에게 체험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바 있으나 농촌 고령화로 현재 마을에선 이마저도 중단된 상태이다.
명주짜기 기능보유자 故조옥이 선생의 전수조교는 다섯째 동서인 이규종 여사가, 무명짜기 기능보유자 백문기 선생의 조교는 5촌조카며느리인 안옥란 여사가 지정됐으나 현재 뒤를 이을 후계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선·신영숙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