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뒤끝이 히끗한 중년의 아버지가
희생자들의 유품 수거함 속에서
어딘지 낯 익은 듯한 휴대폰 하나를 줏어들었다
불에 타다 남은 부분에서
애써 어린 딸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듯
한동안 말 없이 물건을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딸 아이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본다
불에 녹아 사라진 아라비아 숫자의 허공 속으로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자꾸 보내고 있다
어디선가 딸 아이의 웃음소리가
아니, 열어주세요 뜨·거·워.....소리가
환각처럼 쏟아지는 것 같다
이 도시 어디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니면 이미 하늘나라에서
지상의 가여운 아버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어여쁜 딸에게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자꾸 보내고 있다
문득,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뚝! 먼지 쌓인 구두코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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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눈물을 참고서 아버지가 죽은 딸애의 휴대폰을, 숫자가 다 지워진 휴대폰의 아라비아 숫자판을 누른다. 하늘나라에 가 버린 딸애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믿으면서. 딸애가 신호를 받고 단 한마디라도 "아버지"하고 불러줄 것이라 간절히 믿으면서......그러나 무서운 인내와 적막 끝에 끝내 떨어뜨리고 마는 눈물 한 방울......딸애의 죽음으로 하여 아버지의 살아온 날들과 남은 생애가 절망적인 파멸로 빠지게 된'참사 사건'을 그린, 긴장과 아픔으로 가득한 추모시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극명히 깨우쳐 준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한 뼈저린 고발이기도 한 이 시는, 이제라도 우리가 세워가야 할 '사람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 배창환·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