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기 3003년 이른 봄.
우리 소(牛)들이 인간으로부터 우주와 삼라만상 지배권을 되찾은지도 어느덧 천 년의 세월이 흘렀구먼. 회고해 보건대 천 년 전 우리 소들의 조상님들이 인간통치하에 있을 때 그들로부터 온갖 핍박과 고초를 겪었기에 지금부터 당시 인간이 저지른 죄상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이미 우공화국(牛共和國) 황제께서 선포하신 「우공백작(牛公伯爵)」이 우리들의 정식 존칭임을 밝혀둔다.
그때 인간들은 우리 소들을 단순히 평생을 그들만을 위하여 봉사하기를 강요하였고, 뼈 빠지게 일하다 죽으면 살코기는 물론이고 뼈까지 다 먹어 치우고 마는 단순먹거리, 아니면 한마디로 미련곰탱이 이상 생각지 않았다는게 그네들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인간들은 불과 천년 후에 우리 소들의 지배를 받으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하였으리라.
인간들은 순전히 우리들 우공백작을 이용하여 논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 거둬들이지 않았던들 그나마 인간들 종족 보존도 어려웠을 거야.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위치에 있었나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당시 우리 우공백작들은 산과 들에 널부러진 풀을 뜯으며 먹고 사는 데는 인간보다는 유리하였지.
그러나 배부른 행복감을 만끽할 틈도 없이 눈만 뜨면 논으로 밭으로 끌려 다니면서 온갖 힘쓰는 일을 도맡았었고 그나마 때리지만 않으면 견딜 만 한데 회초리를 손에 잡고 늘 후려치면서 닥달을 하였지. 이랴! 이랴! 느리다고 패고, 워! 워! 제때 서지 않는다고 패고, 그저 매를 달고 살았다는 표현이 옳을 거야. 또 간혹 인간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성질 거친 조상님 우공백작께서 뿔로 인간을 들이받는 불상사도 간혹 있었단다.
그렇게 간혹 당하던 인간들이 머리를 써서 우리들 코의 생살을 찢어 코뚜레를 하고 끌고 다녔지.
지금까지 전해지는 당시 조상 우공백작의 기록에 의하면 코뚜레 끈을 길게 매달아 앞에서 끌고 뒤에서 팰 때 고통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었다고 전해 내려온다네. 문헌에 의하면 「인도」라는 나라에 태어난 조상님들은 신(神)과 같은 섬김을 받기도 하였다지만 그건 극소수이고 그 밖의 세계 도처에서 태어나게 되면 최대한 이용당하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고기가 되어 국가 간 무역 대상이 되었다니 너무나 기막힌 노릇이었지.
특히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이란 곳에 태어난 조상님들의 애기를 종합해 보면 너무도 눈물겨워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구먼. 경상도 「청도」라는 곳에는 소싸움 대회라는 연례행사를 만들어 전국에서 모여든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우공백작들에게 싸움을 붙여놓고는 박장대소 좋아하는 꼬락서니라니. 피 터지게 싸워서 다행히 우승이라도 거머쥐면 상금은 몽땅 주인인 인간 손에 들어가니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이런 꼴이 되었지.
또 방목하는 목장에 태어나면 어떤가? 열심히 풀을 뜯어 몸 불리고 젖 불려 놓으면 억지로 젖을 짜서 우유라는 상품으로 내다 팔아 인간들의 배를 채웠지.
잘 생기고 체격 좋은 우공들은 「종자 번식용」이라 하여 허구한날 그 짓거리를 하게 하여 오로지 우리들의 숫자를 늘려서 더더욱 윤택한 생활에만 혈안이 되었지.
전국 각지에 5일장이라는 곳에 「우시장」(牛市場) 이라 하여 우공들만의 전문매매가 이루어졌었지. 그래도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씨 고운 인간에게 팔리면 행운으로 알았다니 이런 기막힐때가…
그런데 당시 악명 높았던 서울 마장동 도살장으로 끌려가면 어떤 최후가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체격이 우람하고 근육질의 흉측스럽게 생긴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인간이 끝이 뾰족한 망치를 들고 슬슬 접근하여 우리 조상들의 정수리를 일격에 강타하면 모든 게 끝이었지.
아니지, 지금부터가 시작이지. 그 후 유통 과정을 더듬어 볼까? 죽어 자빠진 우리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발려서 살은 부위 별로 갈비살, 안심, 등심, 사태, 또 머리 고기로 분류해서 차등을 두어 팔아 먹고, 꼬리는 곰탕용으로, 내장은 내장탕 용으로, 인간들의 눈에 좋다고 간만 찾는 이들도 있었고 ,또 사골이라 하여 뼈는 뼈대로 하나 남김 없이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었고, 마지막 남은 뿔은 장식용으로 판다나 어쩐다나.
그리고 살코기는 끓여 먹고, 구워 먹고, 난도질 쳐서 육회로 먹고, 짜디짠 간장에 졸여서 장졸임을 만들어 두고두고 밑반찬으로 이용하고 우리들의 뼈, 즉 사골의 유통과정은 또 어떤가? 인간의 몸에 보신 된다하여 서너 시간 푹 고아서 먹고 건져 뒀다 또 2차 3차까지 진국은 다 우려먹고 마지막에 빈 껍데기만 남은 뼈는 맷돌에 갈아서 돼지 사료에 섞어 줬다지…
독한 인간들!
지금이야 우리 우공백작들의 지배하에 숨죽이며 우리들 눈치만 보고 버티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이지만 조상님들이 당한 학대를 생각하면 어떻게 복수해야 할지 치가 떨리는구나. 당시 겨울이 되어 우리들의 먹거리인 풀이 없을 때 인간들이 미리 가을에 풀을 베어다 건초(엔시레인지)를 만들어 저장해 두고 겨우내 짚과 함께 썰어 죽을 끓여 주었고 그 중에도 마음씨 고운 인간에게 걸리면 콩도 삶아 섞어주고 때로는 통미꾸라지를 얻어먹기도 하고 때로는 춥다고 거적으로 등을 감싸주기도 했으니 그것으로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만.
따지고 보면 거둬 먹인 것이 우리들 우공백작을 위한 일은 아닐테고 겨우내 살찌워 봄부터 가을까지 혹독하게 부려먹자는 뻔한 심산이지 뭐.
당시 인간들의 주식이던 고기와 흰 쌀밥이 요즘처럼 풀과 나뭇잎으로 바뀐 건 모두가 인과응보라 할 수밖에. 반면 우리 우공백작들은 식생활 개선 덕에 영양가 풍부한 콩으로 만든 통조림과 미꾸라지 전골냄비로 느긋하게 음식문화를 즐기고 있으니 조상님들이 수천 년 동안 혹사당한 것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으로 살고있고 인간들이 저지른 과오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내 놓는다.
3003년 이른 봄에
우공화국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