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희트곡『나그네 설음』을 부른 백년설은 1915년 경북 성주 예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영순(李瑩淳)과 어머니 김차악(金且岳)사이의 3남1녀 중 셋째 아들이었다. 백년설은 그의 예명(藝名)이고 본명은 이갑룡이었다. 1964년 법원의 허가를 받아 다시 이창민으로 개명했다.
1980년 12월6일 65세로 타국 땅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오늘날도 애창되고 있는 공전(空前)의 희트 곡 "나그네 설음"과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남겼다. 현재 조사된 곡만 해도 당시의 일반 가수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70여 곡(이상희 "오늘도 걷는다마는" 도서출판 선, p180참조)을 부른 불멸의 가수요, 당대 온 국민의 애환을 달래준 연인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지 22년만인 2002년의 봄, 고향 성주를 빛낸 희대의 인물이었던 그에게도 봄이 찾아 왔다. 재경 성주 향우회의 올곧은 인사 몇 분이 백년설을 추모하는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 일차적 사업으로 "백년설 가요제"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모임 결과 개최 날짜는 2003년 5월 25일(일)로 하고, 준비위원장에는 이상희 전 장관을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이상희 전 장관은 성주 대가 출신으로 내무, 건설부 공무원들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지성이었다. K기자는 이장관을 “황희 정승보다 더 청빈한 분이고 어머니와 장모를 모시는 효자이고 6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한 걸출한 인걸”이라고 한다.
재경 향우회를 이끌었던 그의 고향 사랑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일화 하나 소개 해보면, 어떤 것이든 星州의 '星'字만 붙어 있으면 반가운 마음에 가격에 구애되지 않고 구입했다고 한다. 성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이번 행사의 준비 위원장으로 최적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도 완강히 고사하시니 준비위원들이 절대로 부담을 주지 않고 이름만 빌리는 조건으로 수락 하는등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준비 위원장을 맡으셨지만 문제는 오히려 고향에서 생겼다고 한다. 친일 가수 운운하는 바람에 이창우 성주군수와 농민회 등의 난상토론 결과 개최는 결정되었지만 개최 3일전까지도 행사여부가 불분명해 관계자들의 마음 고생이 컸다고 들린다.
당대의 명사회자 이상벽과 하춘화, 주현미, 설운도 등 대형 가수들과의 일정 관계에서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행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준비하는 분들의 노고 또한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런 저런 사연 속에서 그 첫 회를 성황리에 끝냈던 25일은 봄비로는 어울리지 않는 많은 비가 왔다. 당일 일기 예보는 오후에 흐린다고만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루종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끝나는 밤 9시 30분까지 소낙비가 내렸다. 7번 후보가 부를 때 조금 그치는 듯 하더니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비가 내렸다. 아니 여름날 장대비가 내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하도 많은 비가 내리기에, 기상청에 근무하는 잘 아는 분에게 여쭈어 보았다. 최근 10여년 간 5월 25일날 성주 지방에 비 내린 적이 없었다 면서 “최박사님 25일날 성주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라며 의아하게 물었다.
“네 좋은 일 있었지요.”
이런 저런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전화를 끝냈다.
내 나름대로 그 날의 비는 '백년설의 눈물'이라는 몇 가지 귀한 의미를 붙여 보았다.
첫째 의미는 백년설이 흘린 반가움과 감격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낯설고 물설던 이국만리 미국 땅에서 유명을 달리한 지 23년만에야 고향 사람들에 의해서 당신을 추모하는 가요제가 개최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 성주를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또한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규모의 행사가 이루어진다는 게 꿈만 같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배 이상희 추진위원장의 철두철미한 진두지휘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흘린 눈물 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희 전 장관은 그가 엮은 책 백년설 그의삶, 그의 노래“오늘도 걷는다마는”서문에서 밝혔듯이 추진위원장을 맡기 전에는 백년설의 고향이 성주라는 것, 본성이 백씨가 아니고 이씨라는 것,‘나그네 설음’과‘번지없는 주막’이 희트 곡이었다는 정도 밖에 몰랐다고 했다.
실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사를 정리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빈약하고 부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칠십을 넘긴 고령으로 두 달 여의 짧은 기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옆에서 본 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실감나게 표현해 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저서에 보면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라던 백년설이 할머니 품에 안겨 “할머니 저 달이 얼마 전에는 크고 둥글었는데 왜 자꾸 작아져 가느냐”“저 달은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왜 우리 엄마는 어디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냐”라고 하여 할머니와 가족들을 모두 울렸다는 가족사 등 백년설의 삶과 노래 인생사를 아주 실감있게 쓴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지만 지면 관계상 줄인다.
둘째는 친일 가수라는 억울함의 눈물일 것이다. 국민 가수가 부른 노래 회절가를 가지고 역사학자도 아닌 본인이 친일이냐 아니냐를 논할 게재는 아니다. 다만 당시 시대 상황을 참조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어떤 역사학자는“일장기를 달고 뛰었다고 손기정 선수가 친일이냐”“누가 손기정 선수에게 친일이라고 돌팔매질을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가 하면, “그렇다면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을 한 손기정선수가 대중 가수 백년설이 일본노래 회절가 하나 부른 것 보다 더 심한 친일 아니냐”고 강하게 항의하는 이도 있다.
각자 보는 입장에 따라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년설이 1절을 부르고, 2절은 박향림, 3절은 합창, 4절은 남인수가 불렀는데 남인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를 친일이라고 탓하지 않고 「남인수가요제」를 군민 축제로 10회나 계속 했는데 왜들 야단이냐”고 볼멘 소리를 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다 일리는 있다. 시각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다. 국사에도 예외는 있고 헌법에도 부칙 조항이 있다. 법관이 법률을 해석하고 재판 하는데는 두가지 기준 잣대가 있다. 하나는 문자적 자구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상황과 주변상황을 고려한 정황적 해석이다. 이처럼 법도 시대상황과 나라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백년설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침략기에 어쩔 수 없이 부른 노래를 시대 상황의 인식 없이 무작정 친일로 매도하는데 대한 억울함의 눈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희망의 눈물일 것이다. 제1회 가요제 예비심사에서 선발된 전국 12명의 가수 지망생들의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면서 한국 가요계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눈물일 것이다. 유성환 전 의원의 개회선언과 함께 첫번째로 출연한 15세 소녀의 발랄함과 예술적 재능과 기교를 지켜보면서 오늘 심사하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각종 문학대회에 나가 짧은 시간에 5, 6백 통의 글을 읽고 심사할 때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고충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해도 남이 부르는 노래는 1절 아니 한 대목만 들어도 알 수 있고, 권투도 1, 2 라운드만 보아도 대충 승부를 알 수 있고, 문학도들의 시나 수필 등도 첫 구절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그 날 첫 후보의 노래로 이 대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K 전의원과 S 여성위원과 대회를 지켜 보면서 예비 가수들의 노래 실력이 뛰어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겠다.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O, O, O번 후보의 음악적 소양을 높이 사겠다고 했더니 공교롭게도 100%적중하였다.
넷째, 군민 화합을 바라는 화합의 눈물일 것이다. 많은 어려움 끝에 개최된 오늘의 행사가 손에 손잡고 부르던 노래 가사처럼 군민의 화합을 바라는 눈물일 것이다.“친일가수이다, 아니다. 일제 침략기에 어쩔 수 없이 부른 것은 이해해야 한다”“개최한다, 성주 땅에서는 절대 못한다”등의 다양한 의견들을 조화롭게 화합해 내지 않았던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분열된 군민의 소리를 하나로 뭉쳐 선비의 고장, 오대양 육대주를 끌고 갈 수 있는 자랑스런 성주, 세계 속에 우뚝 선 성주인의 기개가 번뜩일 수 있게끔 하나로 뭉쳐지길 바라는 눈물일 것이다
제1회 백년설 가요제를 지켜보고, 이상희 전 장관의『오늘도 걷는다마는-백년설 그의 삶, 그의 노래』책을 여러 차례 읽은 끝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보았다.
첫째, 이 책이야말로 백년설에 관한 한 불후의 명작이 될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 침략기의 한국 가요사가 객관적으로 잘 정리되었고, 저자가 연예인이 아니고 그와 일면식도 없기 때문에 정확하고 담담하게 쓸 수 있었다고 본다. 특히 많은 참고 문헌을 두루 잘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저자의 지적처럼 백년설이 회절가를 부른 것은 분명 잘못 되었지만 친일 가수는 아니라고 본다. 동아일보 1980년 12월 11일자“때로는 그가 불렀던 노래가 불온하다고 하여 왜경(倭警)에게 금지도 당했고 때로는 시골 가설 극장에서 왜경의 감시를 받아가며 노래로 서러움을 나누던 백년설, … (중략) …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요, 두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일세”라고 왜경에게 쫓기면서도 남다른 고향사랑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민 가수 백년설이 살아온 인생에서 보듯 그는 남달리 일제에 대한 원한과 저항 의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가 형 혁룡의 영향을 받아 중학생 시절부터 반일 의식을 가졌고, 성주농업보습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에 대한 항명사건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학교에서는 불량학생으로 낙인 찍히고 경찰 당국의 감시 대상자였었다.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눈물을 머금고 회절가를 불렀던 것은 우리 가요사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가 짊어진 치부의 역사 한 부분이고 그의 일생에 옥의 티로 남는 치욕이었다고 봐 주자.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가 회절가를 부른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회절가를 부른 것이 문제가 된다 해도 그것으로 그의 수 많은 예술적 업적마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받은 국민 가수라는 사실이다. 타국 땅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지 23년만인 2003년 2월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온갖 정보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로부터 국민 가수로서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인정 받았다.
나머지 부분은 역사에 맡기자. 고향을 빛낸 그의 영혼이나마『나그네 설움』을 잊고 정든 고향 땅 성주에서 편히 쉬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03년 初夏에
최 도 열 (시인, 수필가. 민주국민당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