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참외는 하우스시설재배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재배단지 규모는 세계적 수준에 손색이 없고, 하우스시설 집약도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참외 품질도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기후에 고도화된 하우스시설재배기술이 접목되면서 ‘세계적 명품참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참외 재배면적은 전국의 70%에 육박하고 연간 2천5백억원 이상의 농가소득을 올려 지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참외특구로 지정됨으로써 명실공히 참외산업은 지역사회의 미래를 밝혀줄 희망의 등불이 되고있다.
성주참외가 오늘날의 위상과 명성을 얻게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하우스시설재배법을 도입해 발전시킨 것이 주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하우스시설재배법은 언제, 어떻게 도입됐을까?
이야기는 약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960년대 초반, 쌀, 보리농사가 전부였던 성주지방에 수박재배 바람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그러나 재배방법은 거의 전부가 노지 재배였으며, 극히 일부 농가에서 기름종이를 이용한 소위 고깔재배로 수박의 발아시기를 촉진시킬 정도였다.
이즈음, 1960년에 육군 대위로 군을 뒤로하고 귀향하여 수박농사를 짓고 있던 벽진면 수촌리의 배판린(75) 씨가 궁리 끝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나무 골주를 이용해 비닐하우스 촉성재배에 착수하게 된다. 비닐하우스라 해봤자 지금에 비하면 소형에다 4자폭의 비닐을 끈으로 이리저리 엮은 것이 전부였다.
1964년 배 씨는 갖은 시행착오와 고생 끝에 마침내 수박의 촉성재배에 성공하게 된다. 여름과일이었던 수박을 이른봄에 출하하자 농민들은 그를 계절의 벽을 뛰어넘은 마술사로, 신화적인 존재로 여기게 됐으며, 그의 영농기술은 즉각 지역농가에 전파되기 시작해 오늘날의 세계적 하우스집단재배지로 발돋움할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배 씨는 이후 촉성재배에 관심을 보인 탁재균, 최동수, 백준현 씨 등과 함께 촉성재배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지금에 비하면 중간정도 크기의 비닐하우스를 마련하고 호박대목 접붙이기 방법을 개발하는 등 큰 진전을 보게된다.
그러나 현지에서 폭이 넓은 비닐과 골주 구입이 어려웠고, 보온을 위해 연탄을 피워야 하는 어려움, 일일이 물지게로 물을 운반해야 하는 과도한 노동력, 연작에서 오는 수확량 감소, 농민들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촉성재배는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박은 점차 소득이 높은 참외재배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 무렵 도청에 근무하던 손진철 군수가 부임하면서 비닐하우스 촉성재배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손 군수는 수박 비닐하우스 촉성재배가 유명한 지역인 만큼 들판에 비닐하우스 시설이 꽉 들어차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부임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으며, 기존 시설도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김해지역의 비닐하우스 촉성재배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손 군수는 그에 버금가는 집단시설을 구상하고 1971년 ‘비닐하우스연구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회원들은 10명으로 구성됐다. 각 면 단위에 1명씩을 배정했으나 당시 수박, 참외 농사가 거의 없었던 수륜, 가천, 금수, 용암면을 제외하고 초전, 선남, 대가, 벽진면에서 2명씩을 선출했다. 당시 회원으로 참여했던 분들은 배판린, 여문환(이상 벽진), 최대무, 여기원(이상 초전), 이태수(월항), 이태봉, 김창원(이상 선남), 임만택, 최동수(이상 대가), 백준현(성주읍) 씨다.
이들은 평균 660㎡(200평) 규모의 대나무 하우스(길이 7.5m)를 짓고 촉성재배로 비교적 높은 소득을 올리는 한편 습득한 재배기술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불비한 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대나무 골주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시·군을 헤맸고, 연탄 가느라 밤샘하기 일쑤였으며, 물지게 지느라 등이 벗겨질 정도였다. 바람불면 비닐 벗겨 질까봐 날밤 새기를 밥먹듯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부락단위 기술전수교육, 영농교육, 외지 견학자 강의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하자니 회원들 본인의 영농은 뒷전으로 밀려 날만큼 많은 시간을 뺏겼고, 영농실패로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실제 백준현 씨를 비롯한 몇몇은 가산을 탕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활동한지 3년여가 경과하자 회원들의 주변지역에서부터 대나무를 이용한 하우스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군내에는 1970년 791hr였던 수박, 참외 재배면적이 1980년 1,394hr로 늘어났다.
수박·참외 영농규모가 커지자 1982년부터 농협에서 하우스파이프를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기타농자재들도 속속 개발 보급됐다. 1987년경 대나무 골주는 철제 파이프로 완전히 대체되면서 명실상부한 하우스집단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비닐하우스연구회’가 발족한지 25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1992년에는 6천4백 농가에서 2,500hr의 면적에 수박·참외를 재배하게 되고 95%에 달하는 2,375hr가 비닐하우스시설촉성재배를 도입해 온 들판이 비닐하우스로 뒤덮이게 됐다.
지금은 전체농가의 50% 이상이 3,883hr의 면적에 100% 비닐하우스시설참외를 재배할 만큼 규모화를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대단지로 탈바꿈하고 참외재배가 지역경제의 명암을 가늠할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한데는 40여년 전 탁월한 미래안목을 가진 한 명의 지도자와 뜻을 같이한 10명의 희생적인 헌신이 낳은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선구자다.
이제 선구자들은 70대 중반 이상의 노인이 돼 일선에서 물러났다. 절반 가까운 분들이 벌써 고인이 됐다.
취재 차 방문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인생여정을 담은 대통령, 도지사, 군수들의 표창증, 위촉장 등과 신문에 보도 됐던 기록물들을 펼쳐 놓고 청와대로 초청돼 건의하고 나눴던 이야기, 이른 봄 수박을 경주호텔로 가져가 박정희 대통령이 시식했던 이야기, 당시의 고충 등 경영 야사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에게 소회를 묻자 “세상 참 좋아졌다. 농사짓기가 이렇게 편해 졌으니…”라며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리는 듯한 말을 하면서 “비닐하우스 농업이 크게 발전된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 성주의 최근세사는 비닐하우스 농법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만큼 그 발전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역사는 기록으로 이루어진다. 기록이 있으면 정사(正史)요, 그렇지 못하면 야사(野史)가 된다. 성주참외가 오늘의 명성을 얻기까지의 발자취나 기여한 자들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 방문객에게 알리는 것은 성주의 역사 정립과 참외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나 단체를 찾아내 그 공적을 기림은 군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제2, 제3의 새로운 선구자, 공헌자를 탄생시킬 것이다.
참외생태학습원 한 귀퉁이에 가칭 ‘성주참외비닐하우스촉성재배 발전사’라는 소박한 기념물이라도 하나 마련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