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사고의 힘’의 저자 노만 빈센트 필(Norman V. Peale)은 적극적인 사고를 갖기 위한 열 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매일 열 번식 다음 구절을 큰 소리로 암송하라고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립보서4:13). 이 마술적인 말은 인간의 열등감을 몰아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고 그는 말하면서 말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철학은 지금까지 언어 문제에 있어서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 구애됨이 없이 보편적인 사유(思惟)를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므로, 사실은 언어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볼노브(Bollnow)는 이것을 전통적인 철학의 언어적대관계라고 표현했다.
철학에서 뿔만 아니라 엄밀한 과학과 교육학 등에서도 그와 같은 언어적대관계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엄밀한 논리는 언어를 통하는 것보다 기호(記號)를 통해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육에 있어서도 직관에 의한 실물 교육을 주장하는 교육하자들이 ‘빈말보다는 실물을 가르쳐 주라’고 언어보다 실물을 앞세우는 실물 교육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언어적대관계의 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과 과학과 교육학이 이와 같이 언어에 대한 적대관계를 가지는 이유 중의 하
나는 언어의 의미가 늘 불확정적이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는 엄밀한 사유의 전개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이다. 동일한 말이 때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가 하면, 또 때로는 동일한 개념을 위해서 여러 가지의 언어적인 표현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사유가 언어에 의하여 잘못 지배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그것을 위해서 낱말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실재한다고 믿는 언신사상(言信思想)이나, 인간의 언어는 마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언령사상(言靈思想)에 대해서 특히 철학과 과학은 늘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몇 십 년 동안에 사정은 아주 달라졌다. 이제 언어 문제는 철학의 가장 기초적인 중심 문제가 되었다. 언어가 인간의 사유와 인식에 대해 갖는 구성적인 기능을 매우 중대시하게 되었다. 카시러(Cassirer)는 ‘상징적인 형식들의 철학’에서 상징적인 형식들이 인식에 있어서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했다. 인간은 그 상징적 형식들에 의해서 그의 세계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징적 형식들 중에서 언어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했다. 카시러에 의하면 언어는 객관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형성하는 것이며, 인간의 언어가 형성해 주는 현실만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한스 립스(Hans Lipps)는 그의 ‘해석학적 논리학’에서 인간의 사유의 논리적 구조와 그것이 거기에서 나타난 삶의 상황과의 관련을 연구하면서 언어의 창조적인 기능 곧 일정한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이 삶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현실을 형성하는 ‘말의 힘’이라고 했다.
인간의 사유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인 조건들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는 삶에 뿌리박고 있는 삶의 하나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는 여러 가지 삶의 조건들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삶의 조건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이다. 언어는 사유를 뒤따라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사유과정 자체에 이미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만(Hamman)은 언어는 이성의 기관(器官)이라고 했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라는 기관을 통해서만 그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볼노브는 언어를 사유의 통로라고 했다. 인간의 사유는 언어라는 통로를 거쳐서만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의 구성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사유에 있어서의 언어의 창조적인 기능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만 빈센트 필이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방법으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여러 번 소리내어 암송하도록 권장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성에도 영향을 준다. 어떤 사물의 전체 형태에 대한 이해는 언어적인 파악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그 사물을 파악하는 언어는 그 사물에 대한 이해를 규정하고 이러한 이해는 다시 그 사물에 대한 감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볼노브에 의하면 무지개의 색깔이 일곱 가지로 보이는 것은 일곱이라는 말의 힘이 우리 감각에 영향을 미친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이와 같이 이성의 기관으로서 인간의 사유를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성적인 지각에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의 세계는 사실에 있어서 언어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훔볼트(Humbolt)도 인간이 객관적인 세계를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통로를 통해서 인식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가 그에게 드러내 보여 주는 대로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객관적인 세계를 재창조해서 인간의 정신적인 이해의 세계를 이룩한다.
언어는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창조한다. 자연현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해석하고 가공하고 정리해서 체계를 이룩하게 하고, 정신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형성하고 규제하면서 일정한 형태를 통해서 의식화한다.
말에는 이와 같이 사람이 보고 듣는 감성적인 기능에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느낌과 이성적인 생각을 이끌어 가는 창조적인 힘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말에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내 마음은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게 만든다. 반대로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낳게 되고 결국 할 수 없게 만든다. ‘…인 것 같아요’라고 하는 자신 없는 말투는 나를 자신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사랑하게 되고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하면 싫지 않던 사람도 싫어지게 된다. 저속한 말을 하면 저속한 행동을 하게 된다.
우리의 하는 말은 곧 우리 마음 밭(心田)에 씨 뿌려지게 되고 뿌려진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다. 민수기 14장 25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약속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27장 2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피의 책임에 대해서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
자가에 못박으라고 한 이성을 잃은 군중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한 대로 그 후 2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아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스에 의하여 단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백만 명이나 가스실 사형장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마음이 제일 먼저 가장 정확하게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이 마음 밭에 심어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 마음에 들리는 나의 말은 하나님이 동시에 들으신다. 천국은 내 마음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계심을 명심하라.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도 부정적인 말이 너무 헤프게 사용되고 있다. 툭하면 ‘못해 먹겠다’는 말을 쏟아낸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선생 노릇도 못해 먹겠다.” “이제 공무원 생활도 못해 먹겠다.” “…노릇도 못해 먹겠다.” 선택받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러한 부정적인 말은 핵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부터 개혁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에 “IMF의 극복, 그것 해볼 만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분이 재임 5년 동안에 한 말 중에서 이 말이 나에게는 가장 감동을 준 말이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 말씀 언(言) 변에 이룰 성(成) 자가 정성 성(誠) 자이다. 말대로 이루어지니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정성스럽게 하라는 뜻으로 본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하지 말라. 말을 기도처럼 하라. 말이 운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인 크리스탈 교회를 세우고 전세계를 향해서 명설교를 해온 TV설교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그의 책에서 시종 I can if I think I can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I can if I say I can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할 수 있다)이라고 감히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