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영남의 영산 가야산은 우리 성주군을 중심으로 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경남의 가야산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조 서기 1619년(광해11) 6월2일자 기록에“경상도 성주의 가야산.....”이란 기록으로 보아 가야산이 성주군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산에 대한 내용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가야산은 고령군,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거창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그 중 우리 성주군에 접한 면이 가야산 전체면적 60.56㎢중 61%에 달하는 37㎢이며, 백두산의 개마고원에서 내려온 지맥이다. 가야산은 준엄하고 수려하며 영겁의 세월에도 한없는 정기를 띈 천하제일의 명산이다. 가야산의 주봉인 칠불봉(七佛峰)은 해발 1433m로 성주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다음 상왕봉(象王峰)이 해발 1430m, 두리봉 1133m, 남산 1113m, 단지봉 1028m, 남산 제1봉 1010m, 매화산 954m 등 1000m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법보 사찰인 해인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을 만드는 산맥을 보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덕유산(1614m)에 이르러 원줄기는 남쪽의 지리산으로 향하는 한편 하나의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대덕산(1290m) 수도산(1316m)과 단지봉(1327m)을 거쳐 가야산에 이르러 크게 산세를 이루어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 본류와 황강을 굽어본다. 가야산 칠불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덕유산,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멀리 보인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산을 돌산과 토산으로 구분하고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 돌 끝이 뾰죽뾰죽 늘어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형상)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골 입구에는 홍류동과 무릉교가 있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 십리에 뻗쳐있다.”라고 한 것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의 봉우리와 골과 천석(泉石)을 예찬한 것이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는 다시 가야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은 선사시대이래 산악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 처로서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다. 가야산의 이름은 '신동국여지승람 권 30'에 보면 “우두산(牛頭山)”“설산(雪山)”“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기달산(  山)”등 여섯 가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 旱災, 水災, 兵禍)가 들지 않는 영험을 말하며 명산으로 불렀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를 보면, 첫째 가야산이 있는 고령, 합천 , 성주지방은 1, 2세기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에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렀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지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도의 불교 성지인 부다가야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 처로 신성 시 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따라서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이 우두(牛頭)였던 것이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의 성지이므로 불교가 전래된 뒤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야산의 정상인 칠불봉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수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며, 가야산을 논할 때 해인사와 우리 성주지방에 있었던 사찰(법수사, 용기사, 심원사 등)과 떼어놓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지명에서부터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면 가야산의 상징성을 살펴보면, 첫째 가야산은 그 지명과 산신전설에서 옛 가야지방을 대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이 있는데, 가야산에는 가야산의 모습과 같이 높고 성스런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가야연맹 내에 있는 많은 산신들이 주인처럼 높이 받들 뿐 아니라 이 지역 내에 사는 백성들이 또한 가장 우러러 믿는 신이였다. 그 모습과 같이 곱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신은 백성들의 갸륵한 소망을 들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가야산 성산봉 큰 바위아래 제단을 차려놓고 옥같이 맑은 물에 멱을 감아 몸을 깨끗이 한 후 하늘신인 '이비가지(夷砒訶之)'의 짝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빌기를 얼마나 하였는지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질 날이 다가왔다. 어느 늦은 봄날 하늘 신께서 여신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소망을 이루어 주겠다는 계시가 내리었다. 그리하여 하늘 신 '이비가지'는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상공에 나타났고, 여신은 이를 맞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깃을 아지랑이처럼 나부끼며 맞이하였다. 뭉게구름 속에 방을 꾸미고 실구름으로 얽어서 가야산 높은 봉우리 상공에서 만난 하늘 신 '이비가지'와 가야산 처녀 산신은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되었다. 꿈같은 세월이 흐른 후 옥동자 둘을 낳았다. 형은 얼굴이 '이비가지'를 닮아 해와 같이 둥그스럼하고 불그레하였다. 아우는 어머니인 여신을 많이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의 이름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하였고, 아우는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불렀다. 형은 자라나서 대가야국의 첫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는 자라서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 사람들은 가야산 여신을 높여 '정견모주(正見母主)'라 우러르게 되었다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왕의 건국전설에는 가야의 북동 경계를 가야산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이른바 오가야 가야연맹의 맹주는 지금 가야산이 있는 고령군, 합천군 일대의 대가야와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였다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시대의 가야산은 낙동강 중·하류 일대 가야연맹의 성스러운 산으로 산악신앙의 대상이며,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 경내에 있었다는 정견천왕사는 가야산신의 사당이고, 가야산 정상에서 근래까지 지내온 산신제는 옛 가야지방의 신이 산악신앙 형태로 잔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호국불교의 성지로 상징된다. '택리지'에 가야산을 비롯한 열두 명산이“세상을 피하여 숨어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어있다.”하고 되어있다. 또“ 옛말에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었으므로 무릇 이 열두 명산을 모두 절이 차지하는바 되었다.”하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절경 지는 절이 모두 모두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서 거찰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으로 둠으로서 더욱 명산, 영산의 이름을 얻었다.《세종실록》지리지의“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 할 곳이다.”라는 옛 기록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 사찰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수 차례의 중흥이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었다. 애장왕의 보은 창건, 고려 태조의 귀의(歸依), 조선 태조의 발원(發願), 그리고 세종, 세조, 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이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의 팔만 대장경판을 600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더욱 민족과 국가의 아낌을 받았다. 이러한 해인사의 흥창과 명성은 뛰어난 형승과 따를 수 없는 지덕을 가지고, 또 삼재불입의 영기서린 가야산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위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신라 말에서부터 시작된 승군의 전통은 희랑(希郞)이 군을 일으켜 고려 건국을 도운 것과 임진왜란 때 승군의병을 지휘한 유정이 만년을 가야산에서 지내다 입적하였고, 역시 임란 때 합천의 의병장 정인홍이 가야산과의 인연이 깊은 곳이다. 민족 수난기에 해인사의 청년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만세운동과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셋째 가야산은 최치원의 은둔이후 역대문인들의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택리지》에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生利: 먹고살기에 적합한 곳)가 박힌 곳이 많다......한낱 산수만 취하여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곳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생각이 날 때는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하고 산수를 유람하는 뜻을 정리하였다. 특히 가야산은 경상도에서 유일한 석화산으로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났다. 또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 십리에 뻗쳐있다고 극찬하였다. 한강 정구(鄭逑)의 〈가야산 기행문〉을 보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듯이 우리 선현들이 산을 유람하는 뜻이 단순히 풍류에서만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으며, 그는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년 처사의 마음 말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고 읊었다. 최치원의 입산이래 천년동안 수많은 선현들이 가야산을 유람하여 바위에 세기고 혹은 문집에 남겨 전하는 시와 문장들에서 경승지를 유람하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산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생활사를 통하여 고대 가야국의 산신이 있는 영산으로서 법보 사찰인 해인사를 품안에 안은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유람 처로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 문학에 나타난 가야산 농산시(籠山詩) 고운 최치원 ○ 첩첩한 돌 사이로 미친 듯 내뿜으며 겹겹한 산을 두드리니, 사람의 소리는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막았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600년 후 김종직이 고운선생의 시에 답하여 ○ 맑은 시의 광염(光 ) 푸른 멧부리를 쏘는데, 먹 흔적은 닳아서 희미하구나. 세상에서 다만 시해(尸解)되어 갔다하나, 무덤이 공산에 있는 줄이야 어찌 알리요. 강희맹 ○ 가야산 좋단 말 십 년 동안 듣기만 했네. 내가오니 구름이 짝이 되고 중이 누웠으니 사슴이 벗하네. 손의 베갯머리엔 차가운 시냇 소리 맑고, 향반(香盤)엔 고요한 밤 깊었구나. 다생(多生)을 고화(膏火)속에 괴로워하던 것, 왜 이다지도 부끄러운가. 이숭인 ○ 가야산 천만 겹을 그림으로 다하기 어려우리. 연기와 구름은 곳이 없어 뿌옇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찬 데도 무성하다. 끊어진 석벽은 우뚝 서서 푸른 하늘을 떠받히고, 흐르는 샘은 곧장 쏟아져 흰 무지개를 끈다. 봄 아침에는 꽃을 꺽고, 가을에는 달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고, 겨울에는 눈을 본다. 가야산의 사시를 뉘 있어 알리. 염공이, 일을 좋아하여 험한 산길을 만흘히 여긴다. 2년을 나쁜 진토에 노고할 때, 맑은 꿈 밤마다 하늘 남쪽에 달렸었네. 아름답다 가야산, 참으로 드물다. 하물며 성주는 나의 고향, 선생의 띠집은 산 동쪽에 있고, 상인(上人)의 연사(蓮社)는 산 가운데 있다. 시 읊고 설법하는 것 두 가지 다 맑은 것이 짝 없으니, 언제나 손을 잡아 굶주리고 목마름을 위로하리. 성주 경계에 진산이 되었고, 합군(陜郡) 동쪽에 형상을 뻗히었다. 푸른 뿌리는 두터운 땅에 서리고, 푸른빛은 개인 공중에 가득하다. 새짐승 못 본 것이 해가 지나도 안개와 노을은 예와 같구나 내가와서 절정에 오르니 망부산(望夫山)이 제일 높다. 산 돌이 험하고 높아 오르기 어려우매, 나귀는 놓아두고 마음대로 지팡이를 짚는다.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의 정성이 감동 시켰고,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이 아득하다. 길고 짧은 등나무 가지는 옛길에 너우러지고, 높고 낮은 나무 잎은 맑은 시내를 덮었다. 하루종일 다녀도 얘기할 사람은 없고, 오직 그윽한 새만이 제 맘대로 운다. ○ 산허린엔 구름 산머리엔 눈, 절집은 아득한 속에서 높고 낮게 앉아 있다. 산신령이 오로지 부처만을 섬기지 않는지, 두어 봉우리 내려와서 한 유궁(儒宮)을 두르고 있네. ● 역사에 나타난 가야산 ※ 고려사에 나타난 가야산 1177년 2월(명종 7년) ○ 기해(己亥)에 우도병마(右道兵馬)가 가야산(伽倻山) 적수(賊首) 손청(孫淸) 및 그 도당(徒黨)을 잡아 베었다. ○ 지리지 11 경상도 금주 본래 가락국으로..... (중략).....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에 흐르고 동북쪽으 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의 대해(大海)에 접하고.....(생략) ○ 열전35 환자 고용보(高龍普) 고용보(高龍普)는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총애(寵愛)를 받아.....(중략).....조일 신(趙日新)의 난(亂) 에 도망하여 숨어서 죽음을 면하였고 드디어 중이 되 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생략) 고려사에 나타나는 가야산은 금관가락국의 경계를 정한 것과 나라의 적수(賊首)들이 숨어 지내는 은신처로 나타나고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가야산 .○ 1416년 (태종16) 2월 16일 “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어 가야산신(伽倻山神)에게 제사지냈다.” ○ 1593년 (선조26) 10월 16일 “ 유성룡과 김명원이 요해지 설치, 중국군의 철수 문제 등을 아뢸 때.....(중략)....대구, 인동 등지만이 아니라 삼가, 고령, 합천가야산, 안음 등지의 산성도 모두 천험이므로 잘 수축하여 근처의 백성을 모아 들어가 지키게 하고 나서 식량을 모두 없애치우고 대비한다면.....(생략) ○ 1593년 (선조26) 11월 7일 비변사가 요해지 축성에 관해 아뢸 때 “ 요해지를 설치하는 일은....(중략).....이 밖에 고령산성, 합천의 야로 산성, 가야산의 금산산성과 안음 등 처의 산성도 모두 절험(絶險)한 곳이 옵니다.....(생략) ○ 1594년 (선조27) 1월11일 최황이 아뢰기를 “아산에는 공세창(貢稅倉)이 있으니.......(중략).......적도가 민간의 소를 탈취하여 그 가운데 작은 것은 잡아먹고 큰 소는 도로 돌려주면서 ‘이것으로 농사를 지으라.’하였으며, 그들의 대장은 가야산에 있다고 합니다.”...(생략) ○ 1594년 (선조27) 1월 25일 갑진 적괴 송유진이 궐정으로 들어왔다.....(중략)......승려 일현(一玄)의 말에 의하면 가야산의 적괴는 얼굴이 얽고 수염이 없는 문사라고 하는데,......(생략) ○ 1594년(선조27) 2월 9일 무오 추국청이......(중략).......어느 겨를에 가야산이나 해도에 들어갔겠습니까.......(생략) ○ 1594년(선조27) 2월 20일 기사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난날 각진에서 얻은 조총은 모두 원수에게 보내어 태반이 중국군의 요구에.....(중략).....또 경상우도 총섭승 신열(信悅)은 각 사찰의 위전(位田)에 보리 종자를 파종하였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궁전을 만든다 합니다.......(생략) ○ 1594년(선조27) 2월 207일 병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어늘 권협의 장계를 보니......(중략)......곽재우(郭再祐)의 말로는 「가야산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지리산의 귀성산성(龜城山城)은 형세가 높고 깍아지른 듯하며 성안이 넓어 보통 산성에 견줄 바가 아니어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천험(天險)이다.」고 하니.......(생략) ○ 1595년(선조28) 11월 20일 무자 충청병사 원균의 계본으로 우승지 정구(鄭逑)에게 전교하기를, “봉서의 사연이 옳은가?”하였다. 회계하기를, “정인길의 아비 순년은.......(중략)........‘정여립의 아들 1인이 아직도 가야산의 둔적소(屯賊所)에 있다.’느니 ‘도내 내포(內浦) 여러 곳의 적과 교통하고 있다.’느니 ‘가야산에서 세 번 진법을 익혔다.’느니.......(생략) ○ 1595년(선조28) 11월 21일 기축 추국청에서 아뢰기를.....(중략)......정여립의 한 자식이 또한 그 안에 참여하였다느니 가야산에서 진법을 익혔다는 등의.....(생략) ○ 1595년(선조28) 11월 23일 신묘 추국청이 아뢰기를 “정인길 ·정의길 ·신여옥에게 다시 초사를 받았더니.....(중략)....정여립이 가야산에 있은 일은 애당초 들어 알지 못하므로 정구(鄭逑)에게 전해 말하지 않았다.”.......(생략) ○ 1602년(선조35) 12월 29일 병진 정오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이덕형(李德馨)........(중략).......“경상도에 토적이 크게 일어나 금오산과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생략) ○ 1604년(선조37) 5월 26일 병자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장계하기를, “ 한재가 너무 심합니다. 가야산·우불산 ·주흘산 등처에 기우제를 지낼 향축(香祝)과 예폐(禮幣)를 내려보내소서.”하였는데, 예조에서 계하 하였다. ○ 1610년(광해2) 10월 5일 병자 주서 원탁(元鐸)이 서계(書啓)하기를, “신이 급히 달려가 성주에 도착해서 듣건대, 곽재우(郭再祐)가 서울에서 성주로 온 뒤 아들들을 현풍 본가에 나누어 보내고 자신은 곧장 가야산으로 들어가 바야흐르 해인사에 머물고 있다 하기에......(생략) ○ 1619년(광해11) 6월 2일 계축 경상도 성주의 가야산 제2봉이 비가 오지 않았으나 저절로 붕괴되었는데 그 소리가 우레처럼 진동하였다. 【이듬해에 성주에 사는 유신 정구(鄭逑)가 죽었는데, 영남 사람들은 이것이 징조였다고 하였다.】 ○ 1620년(광해12) 3월 18일 병신 위관(委官) 조정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고 보니, 신들은 매우 황공하여........(중략).......당초 박치의(朴致毅)가 산에 놀러간 일로 말하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가야산 영약암(靈若庵)에 와 있을 때에 그가 가서 마침 보니, 그대로 상좌를 삼았다고 하였습니다.......(생략) ○ 1623년(인조1) 5월 22일 신해 폐세자 이지가 위리 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중략)......그리고는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생략) ○ 1728년(인조4) 6월 18일 정유 정국(庭鞫)하였다. 이현을 추문하니, 이현이 공초하기를......(중략)......「가야산에 산을 돌아다니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매우 수상하다.」하므로.....(생략) ○ 1785년(정조9) 3월 12일 신유 문양해가 서면으로 바친 공초에서 말하기를, “이른바 녹정(鹿精), 웅정(熊精)이란 곰과 사슴의 몸이 수백 년 동안 지나오면서 변화하여 사람이 된 것인데, 또한 글자도 압니다. 신이 선원촌(仙苑村) 이현성(李玄晟)의 집에서 ‘녹정’을 만나 보았는데, 얼굴은 길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웅정은 얼굴이 흐리고 머리털은 검었습니다. 녹정은 스스로 5백 살이라고 말하고, 웅정은 스스로 4백 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녹정은 신라 말년에 최고운(崔孤雲)이 가야산에 들어가서 공부 할 때.....(생략) ● 가야산에 있는 고적 성주군의 유적지 1). 법수사(法水寺) 통일신라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법수사는 원래는 금당사(金塘寺)라고 불리워 졌다. 서기 802년(애장왕3) 현재의 수륜면 백운리 중기 마을 일대에 건립되어 해인사와 더불어 성주지방의 진원지로 존재하였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계자(季子) 범공(梵空)이 중이 되어 이곳 법수사에 들어가 해인사를 드나들면서 한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 중엽에 절 이름을 법수사로 고치고 임진왜란이후 폐사가 되었다. 절터 중앙에 마을이 생겨 중기라 불리워 지게 되었다. 가야산 남쪽에 위치하였던 법수사는 구금당(九金堂), 팔종각(八鍾閣) 등 무려 1000칸이 넘는 건물과 10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의 곳곳에 그 흔적인 석탑, 돌기둥, 주춧돌과 암자 터 등이 산재해 있다. 암자의 경우 도은암, 보현암, 백운암, 일요암 등의 명칭이 말로만 전해질 뿐 그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법수사에 안치되었던 불상은 폐사 된 뒤에 절 뒤의 골짜기에 잇는 용기사(龍起寺)로 옮겼다가 용기사 마저 폐사 되자 서기 1897년(고종 광무1년)에 당시의 해인사 주지인 범운선사에 의해 해인사의 대적광전의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로서 은행나무로 만든 높이 2.35m의 좌상인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법수사가 폐사 될 때 해인사로 넘겨졌던 것으로 보이는 《해인사지》의 사원전인 백운리 2-1,2번지 논 1386평 등 100여 필지 20000여 평의 자료 표는 사찰의 번성기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법수사 뒤편 용기 골짜기로 들어가는 어귀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옮겨갔고, 절의 본당이 있던 곳은 지금고 거대한 바위와 수많은 돌로 쌓아올린 축대가 뒤쪽인 서편을 제외하고 남아 있다. 그러나 축대 위는 현재 농지로 경작되고 본당 터 중간 3층 석탑, 2등분된 연좌대, 중기 마을 입구에 당간지주와 당간지주 앞의 배례석, 중기마을 동쪽 밭가 있던 시식대는 모 식당의 정원으로 옮겨져 있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석재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2) 법수사지 3층 석탑 1975년 지방유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은 법수사가 건립될 당시에 세워진 탑으로 통일 신라 중기의 일반적인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화강암을 재질로 하여 3개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된 높이 6m의 탑이다. 하대 중석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고, 우석이 있는데 하대갑석은 4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석 받침은 몰딩이 있다. 중대석은 탱주가 있으며 양옆에 우주가 있고, 갑석부연이 조각된 상대갑석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옥개 받침은 각 층 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각은 반전 되어있다. 낙수면은 비교적 완만하며 3층 옥개석 한쪽 모서리가 깨어져있다. 상륜부는 노반이 깨어져 있다. 법수사에 대한 선현들의 글을 보면, 대서기법수장로(代書寄法水長老) 李 崇仁 가을 바람에 기러기 남쪽으로 날려보내며, 한 마리 새로 지은 시를 푸른 산 속에 보내오. 솔의 학과 바위의 원숭이도 응당 슬피 볼 것이니, 지난 해 놀러온 나그네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등법수사남루(登法水寺南樓) 李 稷 예전에 한번 오른 적이 있고, 오늘 다행이 거듭 오른다. 두 손 마주 잡고 읍을 함은 기이한 경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요, 쉬이 떠나지 못하고 주저함은 古意가 깊이 때문이네. 시냇물은 돌 절벽에 놀라고, 빗 기운은 먼 멧부리에서 나온다. 뜻이 통하는 중 친구가 있어서, 근심이 있을 때 더불어 시를 읊조릴 만 하네. 3) 당간지주 1975년 지방유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는 대로서 큰절의 표시가 되고 괘불도 걸고 관등 때에 여러 줄을 매어 등을 달기도 한다. 마을 주민들은 괘불 또는 불기대라고 부른다. 4) 시식대 시식돌 이라고도 불리우는 시식대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의 천도식을 마친 후 잡귀에게 밥을 주며 경문을 읽는 곳이다. 화강암을 재질로 하여가로 1.5m, 세로 0.9m 높이 0.8m로 되어 있다. 중앙에 직경 30Cm의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다. 5) 심원사지 심원사의 창건연대는 법수사와 같은 시기인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심원사는 가정년간(嘉靖年間;1522-1566)에 지원스님이 크게 중수하여 그 규모가 넓고 굉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실화로 인해 1593년에 불타버린 후 다시 중건하였다. 그 보다 앞서 고려 말인 1392년 석존상 스님의 권위는 지국히 엄중하여 국법도 이를 미치지 못했다고 서기 1677년에 간행된 경산지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당시까지도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심원사는 가야산 남쪽에 있다" 하였고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심원의 옛 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을 들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을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라고 하였다. 이 곳의 3층 석탑은 1991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해인사 말사로 하여 심원사를 다시 짓고있는데 이에서 아름다운 주형광배와 아담한 연좌대 등이 발굴되어 현재 심원사지에 보관되어 있다. 6) 용기사지(龍起寺趾) 용기사는 가야산중의 기암이 벽처럼 선 봉우리로서 천년이 넘는 역사를 남긴 절터로서 가뭄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뜻을 이룬다고 한다. 절터 앞 봉두에 한 쌍의 돌이 있는데 이것을 용의 귀라고 하며 이 절터는 대 명당으로 알려 져 있어 수많은 전설과 신기한 영험을 보인 신성한 영혈로 일러 오고 있다. 동편으로 흐르는 계곡에 폭포와 물 탕이 이름 나 있고 한여름의 피서지로 손꼽히며, 이곳에서 발원된 물은 고령군 덕곡면의 가야시대의 가시혜현인 개시리를 적셔주고 대가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금은 나무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수 십리에 걸쳐 아름드리 잣나무가 하늘을 가려 잣의 수확이 엄청난 양이 되었다는 기록을 향토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력 계사년(1593년)에 기 십리의 해송자(海松子:잣)나무를 호남 의병이 태웠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자란 잣나무는 1950년 6·25를 전후 남벌로 인해서 없어졌다고 하며 용기사지의 봉두(峰頭)를 용각대(龍角臺)라고 부른다. 용기사를 두고 황준량은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黃 俊良 돌 누각 밝은 달밤 종소리 들릴 적에, 첫잠에서 깨어나니 속세의 생각이 없어지네. 어디서 검은 치마를 입은 한 道士가, 작은 창 동쪽으로 알연( 然)히 날아간다. 7) 가야산성 가야산성은 가야산 정상에서 성주군쪽으로 소벌 계곡을 끼고 포곡형으로 구축한 석성(石城)이다. 경상도 '지리지'에는“가야산성은 성주에 있는데 둘레가 2730보. 안의 넓이가 183결 52이며, 샘이 여섯 곳, 계곡이 여섯”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석축의 둘레가 15,935척 높이는 5척인데 반은 퇴락 하였다. 성내에는 계곡이 10개 샘이 있으며 매우 험하다”라고 기록되어 하고 있다. 성내에는 용기사라는 절이 있었고 임란 후 수축기록은 승정원일기(선29년)에 나타나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으나 숙종 때 독용산성을 수축할 때 가야산성은 폐기한 듯 하다. 1594년(선조27년 갑오년) 어느 날 이곳에 스님 의병장이 있음을 알고 체찰사 이원익이 듣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승장 신열에게 명해서 옛 성을 다시 고쳐 쌓게 하고 주민들이 병란을 피하게 하였다. 성에 들어서는 남문이 있었는데 승장(僧將) 신열이 세웠고 오성 이항복은 액부초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백운리에서 용기사지로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1Km가량 위로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질러서 쌓아둔 석축이 있고 또 합천군과 경계를 이르는 정상의 서쪽 능선을 따라 남아 있다. 용기사지로 올라가는 계곡에 남아있는 벽은 돌로 쌓은 것으로서 수구 및 성문으로 되어 있는 통로가 있다. 수구와 통로의 폭은 4m이고 통로 동편의 축벽 높이는 2.2m이며 돌로 쌓은 통로의 길이는 11m가 된다. 통로 동편 성벽은 19m까지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그 바깥쪽은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성곽의 구조는 지세에 따라 달리하고 있으나 기본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이며, 성벽은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8) 마애석불 백운리 용기골 동편의 능선에 가야산성과 이어진 경승지로서 백운대(白雲臺)가 있다. 이 백운대 아래쪽에 마애여래 입상이 있다. 이 여래불상은 대좌와 광배를 자연석으로 완비했고 머리에는 넓적한 바윗돌을 덮고 있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타원형의 판석 전면에 양각되었는데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는 비교적 작은 편이고 몸에는 얕은 상의(裳衣)를 입은 듯한 나형(裸形)이고 직립하여 오른손을 들어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을 늘어뜨려 땅을 가르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이를 보아 석가여래의 탄생불임을 알 수 있다. 두발을 가지런히 한 등족립(等足立)의 직립한 형식은 통일신라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한 불상이다. 하나의 타원형 자연석을 광배와 함께 해서 약 1.6m의 높이로 된 손상되지 않은 완벽한 보물 급의 귀중한 불상이다. 9) 일요암 일요암은 고려말기에 호군 송천우가 그의 장인 도길봉을 위해 세웠다. 도길봉은 문화부사를 지냈고 도길봉의 형 도길부는 팔거인 인데 성산부원군으로 서기 1380년 운봉대첩의 성공을 이룬 명장임을 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도길부 아들 도응은 공민왕때 등과해서 명망이 높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 72현의 1인이 되었고 이성계는 교우(交友)의 정으로 호를 청송당(靑松堂)이라 했다. 도길부(都吉敷)는 최영, 조민수 등과 함께 고려에 충을 굽히지 않자 대권을 노린 이성계에 의해 죄를 쓰고 쫓기는 몸이 되어 심원사에 머무를 때 순군이 심원사에 이르자 석존상(釋尊尙)스님이 앞에 나서 꾸짖기를 “비록 죄지은이가 있던 없던 사문(沙門)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해서 이들은 물러갔다고 경산지(京山誌)는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송천우가 세운 일요암에서 이들은 500년 고려 왕조를 그리며 허무함을 달랬다고 한다.
최종편집:2025-05-15 오후 05: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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