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아내를 돌보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아내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도움 없이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다. 아내를 돌볼 사람이 없어 1톤 트럭에 아내를 싣고 행상을 하며 살아가는 이 남자는 그 병든 아내를 극진히 보살핀다.
머리를 감겨주고 밥을 떠 먹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남자가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병든 아내로 인하여 힘을 얻고 살 의욕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나빠만 가고 더 어려워지기만 하는 상황에서, 더 나아지리라는 소망도 없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그런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5월 가정의 달에 가정의 핵심인 부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들 때는 자기 형상대로 흙으로 지어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아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되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그의 배필이 되게 했다. 그러므로 부부는 본래 한 몸에 속한 불가분리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이것이 기독교의 부부관이다.
그런데 동양의 부부관은 중국 소설 ‘옥루몽’의 주인공 고보옥(賈寶玉)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여자는 물로 만들어졌고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여자는 영리하고 친화력이 있어 물에 비유했고 남자는 어리석고 제멋 대로여서 흙에 비유한 것이다. 만약 창세기를 쓴 사람이 고보옥의 이 말을 들었더라면 인간 창조의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라고 중국의 석학 임어당(林語堂)은 말했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지어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아담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담은 곧 부셔져서 가루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을 가져다가 흙에 부어 이겨서 다시 아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의 몸에 들어간 물을 하와라고 불렀다” 어쨌든 여자는 물이요 남자는 흙이라는 부부관은 설득력 있고 건전한 부부관이라 볼 수 있다. 물은 흙 속에 들어가서 흙의 모양을 형성한다. 흙은 물이 있어 부셔지지 않고 존재하며, 그 흙 속에서 물은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부부는 흙과 물 사이임을 상징하는 시가 있어 여기 소개하려고 한다. 작자는 중국 원 나라의 조맹부(趙孟)의 처 관도승(管道昇)이다. 조맹부는 송설체(松雪)라는 서체를 창시한 당대에 제일가는 서예가요, 동시에 이름난 궁중 화가였다. 그의 처 관도승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남편의 실력에 걸맞은 회화와 시작(詩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대나무 그림과 관음상 등 불상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 당시 황제인 쿠빌라이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부부는 금실도 매우 좋아 그 칭송이 저자 거리에 자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조맹부가 퇴근할 때 마침 가마가 없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어떤 가마 속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최운영(崔雲英)이라는 가희(歌姬)였다. 얼마 전에 어느 잔치 자리에서 노래를 잘못 불러 낭패를 당했을 때 조맹부가 그 곤경을 모면하도록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조맹부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여 이로 인해서 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맹부는 시를 한 수 지어 아내에게 내밀었다. “나는 학사고 당신은 부인이오. 왕(王) 학사에게 도엽(桃葉), 도근(桃根)이 있고, 소(蘇) 학사에게는 조운(朝雲), 모운(暮雲)이 있다는 소리 어찌 못 들었겠소. 나는 곧 몇 명의 오희(吳姬)와 월녀(越女)를 얻을 것이오. 당신은 이미 나이 40이 넘었으니 나의 심신을 독점하려 하지 마오”
여기서 왕 학사는 왕안석(王安石)을 소 학사는 소동파(蘇東坡)를 빗대어 한 말인데, 이 말을 들은 관도승은 자신의 심정을 담은 아농사(我詞)를 지어 조맹부에게 보여 주었다. “님과 내가 이처럼 다투는 것은 정이 너무 넘쳐서이리라. 흙 한 덩이 집어서 축이고 이겨 나의 모양 만들고 님의 모양 만든 다음, 부수고 깨뜨려 한 데 놓고 물 부어, 이기고 또 이겨 님 만들고 나 만들면 내 흙 속에 님 계시고, 님 흙 속에 나 있겠네. 아무도 우리를 가르지 못하리니, 살아서 한 이불에 잠자고 죽어서 한 무덤에 묻히리”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으로 조맹부는 첩 들이려는 마음을 얼른 거두었다.
“내 흙 속에 님 계시고 님 흙 속에 나 있겠네(我泥中有 泥中有我)” 이 시구는 지금도 중국에서 다툼이 생길 때 ‘우리끼리 왜 이래’하는 화해의 뜻을 전할 때 애용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어떤 가수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은 편할 곳 없었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 이득만을 위한 삶, 내 편함을 추구하는 삶, 나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행상 트럭의 남편이 점점 더 나빠만 가고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더 나아지리라는 소망도 없이 그저 그 병든 아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족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남편 속에 항상 아내가 들어 있고, 아내 속에는 언제나 남편이 자리 잡고 있어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부는 ‘나와 너’가 아니라 항상 ‘우리’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