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영 전 군수가 지난 13일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해 군민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김 전 군수는 당일 왜관에서 운동 중 쓰러졌으며, 곧바로 인근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최근까지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던 김 전 군수가 절명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인 및 군민들은 도저히 믿기 지 않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창국 전 부군수는 “안타깝다. 아직 군 발전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갑자기 서거한 것은 큰 슬픔이다. 우리는 큰 별을 잃었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최두병 전 성주농협장도 “다정다감하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분이었는데 졸지에 유명을 달리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군민들의 큰 슬픔이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병호 경일교통 대표도 “박식하고 논리 정연해 어려움이 있으면 염치 불구하고 조언을 구했는데 창망간에 운명하시니 가슴이 먹먹하다”며 아쉬워했다.
성주읍 배모 씨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제 점심 식사할 때만 해도 정정하시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대부분 소식을 접한 군민들도 아연실색하며 사실여부를 확인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사무처리에 있어서 선이 굵고 뱃심이 두둑하기로 소문났던 김 전 군수는 평소 존경하고 따르는 지인들이 많았다. 성주출신 인사들은 물론이고 명망 있는 정치 경제계 인사들까지도 그를 흠모했다. 빈소를 꽉 메운 조화와 문상객들만 봐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젊은이들을 아끼는 마음은 남달랐다. 음식점에서 지인들을 만나면 대납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주변에서 출마를 권유해도 후배에게 길을 터 줘야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중대사에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근자에까지도 군정을 염려해 충고를 보내고 정치인에게는 성주군 현안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요구와 이를 공약으로 선택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교훈적 이야기를 들려주고 추억을 회상하며 무용담 등으로 좌중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현직에 재직할 당시 농민들을 도와 주던 일, 중앙정부 실무자와 담판으로 교부금을 더 타냈거나 공사인가를 받았던 일, 중국을 방문해 협의하던 일, 고속도로 조기개통을 위해 정부 요로를 찾아다니며 고생했던 일, 군 생활에서의 애환 등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만큼 많은 경험들을 전수했다. 실제 김 전 군수는 다년 간 유도를 단련해 웬만한 젊은이들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완력을 갖추고 있었다.
김 전 군수는 평생을 지역발전에 공헌했으며, 큰 족적을 남겼다. 1965년 공직으로 출발해 13년 동안 군 발전과 군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헌신했으며, 이후 성주농협조합장(1978), 성주군의료보험조합대표이사(1988), 민선 초대 및 2대 성주군수(1995∼)를 역임하면서 오늘날 성주군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성주라이온스 회장(1980), 성주군 유도회장(1994∼), 가락 성주군 종친회장(1992∼), 경북4H후원회장(1994∼), 성주군녹색실천연대 회장(2005∼) 등을 지내면서 민간단체 발전과 군민화합에도 남다른 애정과 열성을 보였다.
김 전 군수는 대구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을 수료(1991)했으며, 1983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3년에는 산업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화자 여사와의 슬하에 두 아들과 딸 셋을 두었다. 맏이는 경찰복무 중이고 차남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으며, 세 명의 사위는 은행, 변호사 등 명망 있는 직장에 재직하고 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주식회사 가야개발 장으로 치러지며, 17일 많은 조문객들이 애도를 표하는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한 후 본가, 군청, 태생지인 월항면 울뫼 마을을 거쳐 월항면 대산2리 가장골 선영에 안치됐다.
김 전 군수는 비록 저승으로 가셨지만 이승에서 남긴 치적과 큰 발자취는 군민들의 가슴에 길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별고을의 별 중 큰별이었던 김 전 군수의 서거에 애도를 표하며, 머리 숙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