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죠(Cojot)라는 프랑스인은 골드버그(Goldberg)라는 유대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덟 살 때,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느 기독교 가정에서 그를 데려다 키웠다. 그 후 이 소년의 친부모는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 죽었다. 프랑스인으로 성장한 코죠는 우연히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라면서 다른 프랑스인처럼 유대인을 멸시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오른손이 붓고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도 그것을 고치지 못했다.
열등감이나 화를 품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 현상처럼 그도 악착같이 노력해서 은행가로서 성공했다. 그는 볼리비아 라파즈의 프랑스 은행 지점장이 되었는데, 그곳에 나치스의 프랑스 지구 책임자였던 크라우스 바비(Klaus Barbie)가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비야 말로 그의 부모님을 죽인 총책임자라고 지목하고는 그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오른손이 여전히 아팠지만 사격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저물어 가는 오후에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바비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권총을 잡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코죠는 자신이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두려워 떨거나 흥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발사하지 못한 이유는 나 자신이 저 노인을 죽일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나치를 죽일 수 있었다. 클라우스 바비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나치의 그림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에 대한 나의 증오심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코죠가 클라우스 바비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자기에게 그 노인을 죽일 자격이 없다는 자기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용서한 후부터 오른 손의 통증이 멈추고 부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증오심을 몰아내어 마음의 평안을 주고 육체의 질병까지 치유하는 힘을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는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감옥에 갇히는 것은 마음이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원망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미움을 조장하고 극대화한다.
“용서하는 사람은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고 앞으로 전진하지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아픔과 억울함에 갇혀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용서만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나날이 성장하는 사람과 그냥 그대로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용서이다. 용서하는 사람은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고 앞으로 전진한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아픔과 억울함에 갇혀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용서만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다.
용서의 반대는 복수이다. 증오심과 복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파괴되는 것은 증오심을 품은 바로 나 자신이다. “증오심은 두 개의 무덤을 판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상처받아 한 번 죽고 증오로 인하여 또 한 번 죽는다는 말이다. 증오의 함정에 한 번 빠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창의력도, 자제력도, 소망도, 일할 의욕도 사라져 버린다.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그 좁아진 마음은 드디어 증오만 남게 된다.
증오심과 복수심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고통의 엘리베이터’에 태운다. 두 사람이 무승부가 될 때까지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를 못한다. 그 고통의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자꾸 높이 올라만 가고 급기야는 추락하여 두 사람을 모두 파괴해 버린다.
만일 우리가 ‘눈에는 눈’이라는 슬로건으로 인생을 산다면 머지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고 말 것이다. 이 고통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유일한 길은 용서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F가 필요하다. 하나는 Forget(잊는 것)이고 또 하나는 Forgive(용서하는 것)이다. Forget과 Forgive로 과거의 삶과 고통을 태워 버려야 한다. 58년 전 6 25 때 당했던 가지가지의 억울함, 사무치는 원한들도 다 잊어버리고 용서하고 이 날을 화해의 새 날로 승화시키자.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으니까 벌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다. 증오심에 갇혀 있는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아니하고 어두움에 갇혀 있는 그 상태를 말한다. 일흔 번식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용서하고 빛으로 나오라는 간곡한 말씀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쓴 뿌리는 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상대를 닮아가게 되고 자신조차도 미워하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도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도 없다. 다만 용서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