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의 시조는 많지 않다. 퇴계가 도산곡 12수와 청량산가 1수 정도의 한글문학이 있고, 율곡은 고산구곡가 10수가 있다. 여기서의 두 성현의 시조를 비교하는 것은 학구적인 비교가 아니라 극히 단편적인 비교이며 나의 느낌 정도를 서술하고자 한다.
비교 평가의 대상은 퇴계의 와 율곡의 셋째수로 국한한다. 비교할 두수의 시조를 다음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
백구ㅣ야 헌사하랴 못 미들슨 도화ㅣ로다
도화ㅣ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ㅣ 알가 하노라
●전문풀이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소문 내겠느냐, 못 믿을 것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부들이 알까 두렵구나.
이곡(二曲)은 어드메고 화암(花岩)에 춘만(春晩)커다
암파(岩波)에 꽃을 띄워 야외(野外)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
●전문풀이
이경(二景)이 어디인가 화암에 봄이 무르익었네.
바위사이 물결에 꽃을 띄워 세속으로 보내노라.
사람이 절경을 모르니 알게한들 어떠하리.
전문풀이는 웹문서용임을 고려해 아주 간략하게 풀이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지만 성격이나 그들이 지향했던 학풍의 차이 뿐만 아니라 나이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두사람은 율곡이 23세 때 성주 처가(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사위였음)를 다녀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 계당에서 강학과 후진 양성에 힘쓰던 58세의 노대가 퇴계를 방문하여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한다.
먼저 이황의 를 보면 청량산 서른 여섯봉우리를 육륙봉이라 표현했고 청량산이란 말이 주는 의미와 음성적 아름다움은 그다음의 울림소리로 이루어진 육륙봉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그 절경을 형성하는 제재로 흰 갈매기와 붉은 복숭아꽃을 꼽았다. 갈매기를 신뢰하고 복숭아꽃을 불신하였다. 이는 색채로 대비되는 백색을 신뢰하고 붉음을 믿지 못하는 유교적 가치관과도 일치한다. 붉은 복숭아는 흔히 노류장화 즉 누구든지 가까이 할 수 있는 지조없는 여자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색 이미지를 가진 백구는 고고함을 나타내는 문학의 소재로 주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미 청량산 속에 들어서서 자연과 동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청량산의 자연을 그 가치를 모르는 범부들과 함께 나누고 싶지않다. 오직 자연은 그것을 알고 소중히 하는 사람들의 것으로 삼고 싶다. 이것이 이황이 지향하는 자연의 세계요 주제 의식이다.
한편 이이의 고산구곡가 셋째수는 봄이 무르익은 화암의 경치를 완상하다 지명(地名) 화암에 걸맞는 꽃을 계곡의 물결에 띄워보낸다. 띄워보내는 의도가 화암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곳으로 와서 아름다운 경치와 화사한 꽃을 구경하라는 의도이다.
다시 말하면 율곡의 의도는 화암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든 사람과 함께 공유하려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경치를 공유하는데 그의 주제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산구곡가는 청량산가와는 창작의도가 다르며 창작의도 면에서는 도산곡과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도학사상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초장에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셋째 수인 이 노래에서도 도학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으며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에서 "승지(勝地)"를 도학의 깊은 경지로, "알게 한들 어떠리"를 도학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라고 해석한다.
두 시조의 차이를 보면 퇴계의 시조는 청량산을 자신과 백구(白鷗), 도화만이 있는 세계에 묶어두려 한다. 아름다운 선경에 대한 독점의식을 보이고 있다. 유학자들은 물욕을 경계하지만 유독 자연에 대한 소유욕만은 아무리 커도 욕심이라 보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퇴계의 사고는 확산을 꺼리는 수렴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율곡의 고산구곡가 셋째 수는 같은 도원경(桃源境)의 아름다움을 읊었지마는 그 아름다운 경치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이에게 알려 함께 즐기려는 공유의식을 가지고 있다. 즉 생각이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확산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를 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각각 단 한편의 작품으로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퇴계는 신중하고 내면적이며 학문 지향적이며 문학의 작품도 곱씹고 다듬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율곡은 활달하고 외부 지향적이며 정치 지향적이며 문학 작품 창작에 있어서도 거침없이 시상을 구상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퇴계는 수렴적 사고를 근간으로, 율곡은 확산적 사고를 근간으로 작품 창작에 임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율곡의 문학이 문학적으로 우수하다는 말은 아니다. 도산곡과 고산구곡가를 비교해 보면 시상이나 표현 방법면에서 퇴계의 도산곡이 훨씬 다양함을 지니고 있으며, 문학적 수준면에서 고산구곡가는 그에 비해 단순함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