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 떨면서 예수님의 동상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문둥이의 이마에 물이 떨어졌다. 그것은 문둥이의 딱한 형편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궁휼의 눈물이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본 문둥이는 놀라며 동상이 어떻게 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동상을 바라보던 문둥이는 예수님이 쓰고 있는 가시 금관이 갖고 싶어졌다. 저것만 있으면 내 병도 고치고, 나와 같이 불행한 사람도 그 불행으로부터 구해 줄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예수님의 동상으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이 금관을 가져가라. 너 같이 가난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시멘트에 너무도 오래 갇혀 있어서 괴롭고 답답하기 짝이 없다. 오래 전부터 너 같이 가난하고 정직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시멘트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내가 꼼짝을 못하겠구나. 너하고 정말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를 좀 해방시켜 다오. 제발 나를 이 시멘트 동상으로부터 해방시켜 다오” 김지하가 쓴 ‘금관의 예수’에 나오는 가난하고 정직한 문둥이와 콘크리트 동상으로 변해버린 예수님과의 사이의 대화로서 예수님을 팔아먹는 한국교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거기 있다. 올해로서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해방된 지 63년이 된다. 우리가 싸워서 얻은 해방이 아니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라고 해서 8.15해방을 언필칭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로 해방자로 오신 예수님이 지금 한국 교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서 답답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해방자 이신 예수님을 도리어 율법주의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다. 성서문자 우상주의에 빠져서 아직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여자 장로, 여자 목사의 안수를 거부하는 교파가 있다. 4천년 전의 이스라엘 민족의 세제였던 십일조(十一租)가 21세기의 오늘에도 금과옥조로 강조되고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라기의 말을 들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도둑으로 매도되고 있다. 회개보다는 축복에 더 열을 올려 스스로 무속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 헌금은 복채가 아니요, 목사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요, 선지자이지 기독교 무당은 아니다. 힘있는 자의 아성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고 있다. 본래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자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강한 자, 있는 자들이 목에 힘을 주고 드나드는 높은 아성 같아 보인다. 강한 자에게는 더욱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호화로운 호텔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을 축복하고 찬양하는 기도회를 여느라고 바빴다.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이 교회 장로라고 해서 온갖 부정 비리를 눈감아준 것이 오늘의 교회이고 오늘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자에 대해서는 비굴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무정하고 무관심하다. 한국 교회는 구미문화라고 하는 감옥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고 있다. 예수님은 매부리코의 유대인이요 유대 나라는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예수님은 점차 표백화되어서 완전히 백인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예수님은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국의 옷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국악으로 창송하는 것을 경건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앙상담에서 가장 많이 대두되는 것이 십일조와 제사 문제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이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철저하게 금한 것은 개신교보다 100년 전에 전교된 천주교이다. 그 천주교에서는 이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기보다는 조상에 대한 추모의식으로 보고 위패나 지방 없이 음식 차려 놓고 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리라는 것은 인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다. 한국 풍토에 어울리는 기독교로 정착되어야 한다. 조상 묘 앞에 꽃을 꽂아 놓는 것은 허용 되고,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성경 해석도 자구 해석에만 얽매이면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학의 밥이 되고 만다. 그 정신을 존중하는 상징적 해석이라야 한다. 한국 교회는 가두어 놓고 있는 예수님을 해방시켜라. 율법주의의 감옥에서, 무속주의의 틀에서, 강한 자의 아성에서, 구미문화의 격식에서….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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