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풍찬노숙 그리고 감옥 생활
그런 남편 김찬기와의 결혼 십년
사랑한 시간은 그 절반도 못되었다.
참 선비는 뼛속에
서릿발 같은 회한의 칼날을 세우고
피로써 우매함을 태우는
횃불의 혈서를 쓰기에 그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더운 여름날 땀내 나는 홑옷을
벗는 것보다도 더 가벼이 여겼다.
창숙 선생 일제의 고문에 어금니 깨물며
자신의 무릎 뼈가 다 부서져 나가는 걸
내려다보면서도 독립의 기개는 오히려 푸르고
앉은뱅이 되어 벽만 바라보는 벽옹은
무릎은 꺾여도 뜻은 꺾을 수 없었다.
난세에 그런 시아버지는 시아버지가 아니었다.
스물일곱 꽃다운 손응교 여사에게
서른 살 창창한 남편을 시신으로 안겨 주었다.
자식도 죽음으로 내다 버리는
민족의 스승이 가는 길은 따로 있었다.